『KINO』 1999.05.인물

HISTOIRE(S) DU CINEMA

1936년 9월 9일

pensée-cinematheque

앙리 랑글로와, 시네마떼끄의 문을 열다

앙리 랑글로와는 그의 동료 조르쥬 프랑쥐와 함께 열두편의 영화 시사를 가졌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이 영화들은 이 시네마떼끄의 첫번째 소장목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이것이 영화를 지키고, 보호하고, 물려주고, 그래서 언제든지 지나간 모든 영화에게 다시 한번 발견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네마떼끄의 일보가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앙리 랑글로와는 모든 영화의 또 한 명의 아버지가 되었다.

미술사의 비극 중의 하나. 아마도 회화의 역사 속에서 <시민 케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걸작은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일 것이다. 그러나 거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정말 다빈치가 그 그림을 어떤 모습으로 남겼는지 알지 못한다. 그 유구한 세월 동안 부숴지고 탈색하고 거기에 (감히 다빈치에는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삼류화가들이 복원을 명목으로) 멋대로 덧칠까지 하고 난 다음이어서 이제 그 그림은 위대하다는 진술 이외에는 마치 한 점의 시뮬라크라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영화가 그와 같은 경로를 밟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을 가로 막은 유일한 가능성은 앙리 랑글로와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앙리 랑글로와는 영화의 역사 속에서 아주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결코 영화감독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게다가 영화에 관한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영화를 편애하지 않았으며(실제로 그러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모든 영화들이 모여서 새로운 영화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앙리 랑글로와의 생각으로 영화는 한 자리에 모여서 보여져야 하며, 만일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그 영화들은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근심한 첫번째 사람이다.

그 근심에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토키를 맞이하였고, 변덕스러운 대중들로부터 무성영화들은 차례로 버림받기 시작했다. 만일 이대로 방치한다면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라져가는 영화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앙리 랑글로와는 우선 이 영화들을 먼저 한 자리에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랑글로와가 이것을 처음부터 영화박물관의 개념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이미 시작되었던 수많은 시네 클럽 활동을 이어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랑글로와는 점점 더 사교모임 집단으로 변모해가는 당시의 시네 클럽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친구이자 이론가였으며 실험영화 작가였던 죠르쥬 프랑쥐와 함께 열편의 실험영화 상영을 시작으로 일단 먼저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영화들부터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앙리 랑글로와에게 미래의 시네 클럽에서 프로그램이란 곧 수집이었다. 또는 그 역도 랑글로와에게는 진실이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어야할 뿐만 아니라 오래된 영화들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1936년 9월 9일 마르술랑 29번가에 자리한 작은 건물에서 앙리 랑글로와와 그의 친구들이 모여 처음 작은 시사회를 가졌다. 그는 이것을 ‘시네마떼끄 프랑세즈’라고불렀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이 영화의 역사 속에서 시네마떼끄를 시작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랑글로와는 영화상영을 위해서 원칙을 세우지 않았으며, 실험영화와 고전과 B급영화와 잘 알려진 대중영화들을 자유자재로 뒤섞어 놓았다. 그것은 그 모든 기준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기를 선택한 결정이 되었다. 랑글로와가 걱정한 것은 사라져가는 무성영화들이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다가올 두번째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속에서 아무도 영화따위를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일 시네마떼끄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영화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리거나 사방에 흩어져서 거의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유산을 전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앙리 랑글로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게임의 규칙>이 유럽 전역에 수없이 다른 판본으로 흩어져 있던 것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하나의 완전판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 수많은 필름들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판명받았던 장 비고의 <아딸랑뜨>가 어떻게 불현듯 기적처럼 발견될 수 있었을까? 또는 시네마떼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까이에 뒤 시네마」의 아이들이 누벨 바그라는 연대의 전선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빔 벤더스가 어떻게 오즈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시네마떼끄는 영화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내고, 영화를 언제나 현재의 것으로 만들었다. 영화를 고색창연한 박물관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 숨쉬는 동세대의 시네마떼끄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