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1999.05.인물

HISTOIRE(S) DU CINEMA

1970년 크리스마스

pensée-master

파스빈더, 더글라스 서크를 발견하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연극과 영화를 오가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아직은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몰랐다. 방황하던 파스빈더는 그 대답을 뮌헨 시네마떼끄에서 가진 더글라스 서크의 회고전에서 찾았다. 그럼으로써 50년대 헐리우드 유니버설 멜러드라마는 70년대 분단독일을 비판하는 파스빈더의 서사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술가는 언제 어디서나 그 스스로의 힘으로이루어지는것이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영화를 말 그대로 막 찍고 있었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1965년 베를린 영화학교 입학시험에서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10분짜리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더 이상 영화 수업을 받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연극 극단인 액션 시어터를 만들어서 그의 동료들과 함께 무대도 올리면서 극단적인 초저예산과 정부 보조금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파스빈더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왜 이런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외로워서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영화는 그가 장면을 분할할 줄 모르기 때문에 롱 테이크로 촬영되었으며, 거의 이주일만에 촬영을 끝내고 완성되었다. 그러나 파스빈더는 매번 이상한 열정과 영감을 그의 영화 안에 불어넣었다.

1970년 가을 파스빈더는 뮌헨에 있는 영화박물관에서 더글라스 서크 회고전을 도왔다. 여기서 더글라스 서크가 헐리우드의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만든 50년대 멜로드라마를 상영하였다. 이 멜러드러마들은 파스빈더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천국이 허락하는 모든 것>과 <인생 모방>(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슬픔은 그대 가슴에>라는 제목으로 클래식 전용관 오즈에서 기적적으로 리바이벌되는 그 영화)은 파스빈더를 사로 잡았다. 그래서 그 해 크리스마스에 파스빈더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스위스 루간모에서 그의 여생을 보내고 있는 더글라스 서크를 방문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파스빈더는 말했다.

“내가 이제까지 만든 열편의 영화는 모두 나 개인을 위해서 만든 영화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만들 영화는 대중들을 위해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와 인간 더글라스 서크와의 만남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을 내게 보여주는 방식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그 어떤 것을 지금 발견했다”

1970년 말에서 1971년 초는 파스빈더의 인생에서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네아스트로서의 인생의 출발이 되었다. 그는 70년에만 일곱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지만 그 이듬해에는 단 한편의 영화도 만들지 않았다. 거의 글을 쓰지 않는 파스빈더는 71년 2월 1일 잡지「텔레비전과 영화 Fernsehen und Film」에 이례적으로 더글리스 서크에 관한 글을 썼다.

“나는 더글라스 서크의 여섯편의 영화에 관해서 쓴다. 그 영화들은 문학이 아니라 인생을 바라보게 만드는 그 어떤 것을 갖고 있는 영화에 관해서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오랜 침묵 이후 파스빈더는 그 자신의 영화사인 탱고 필름을 만들어 그 첫번째 영화로 <과일 장수>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서크에게 매혹된 파스빈더가 사실주의 멜로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여는 영화가 되었다. 73년 그에게 깐느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의 영광을 안겨준 <불안을 영혼을 잠식한다>는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하는 모든 것>(56)의 표현주의적 리메이크였다. 그리고 록 허드슨은 여기서 터키에서 온 불법이민 노동자 알리가 되었다. 브레히트를 경유한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들은 그가 선언한 대로 파스빈더를 전후 독일영화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시네아스트로 만들었다.

파스빈더는 서크의 대중적인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사랑이란 사회적 억압의 가장 교활하며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는 것을 드러내는 멜러드라마의 통찰력을 보았다. 그는 <페트라 폰 칸트의 비통한 눈물>과 <에피 브리스트>,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서 여자 주인공들을 내세워 더글라스 서크의 유산을 펼쳐보였다. 이러한 영화들은 파스빈더의 초기영화들에서는 결코 볼수 없는 것들이었다. 파스빈더 이전에 더글라스 서크로부터 이러한 깨달음을 이끌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스빈더는 그 누구로부터도 영화를 배우지 않았다. 그는 온전하게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깨달은 사람이다. 같은 말이지만 파스빈더는 그 스스로의 힘으로 예술가가 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