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2000.01.인물|시론

retrospective 1999 回顧九九

깐느와 베니스의 단편영화들

송일곤「키노」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남겨주고 싶은 아름다운 숲과 바다와 자연이 갖는 공기들, 그 속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면 더욱 극단적이고 사무치게 슬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따뜻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결정한 동반자살은 무섭고 소름 끼치는 것이지만, 그 아이가 앞으로 기억할 것은 햇살이나 바람소리 같은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맛이나 색깔인 것이다.

이인균「키노」

<집행>의 이야기는 1954년에 있었던 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었다. 처음에 이야기를 듣는 순간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사형수의 느낌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졌는데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다른 존재의 이미지였다. 다른 하나는 신부의 캐릭터로 인간의 답답합에 대한 대표성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행위가 확고한 신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무서운 일이다. 상황이 주는 호흡을 추상적으로 만들고자 한 것도 그런 질문의 대표성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성숙「키노」

사실 운동권이나 노동 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제 입도 벙긋 못하겠어요, 거창한 주장보다는 작고 세세한 것들을 주의깊에 바라보고, 소박한 마음으로 윤제의 본질을 건드려 나갔던 작가 김소진의 죽음을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이고, 내가 할 수 있는가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네아스트들의 작은 좌표

<소풍>, <영영>, <동시에>, <집행>, <베이비>, <냉장고>

단편영화의 르네상스? 그럴지도 모른다. 깐느에서 송일곤의 <소풍>이 우수상을 받았고, 김대현의 <영영>과 김성숙의 <동시에>, 그리고 이인균의 <집행>이 초대받았다. 석달 뒤 베니스에서는 임필성의 <베이비>와 안영석의 <냉장고>가 초대받았다. 그들은 결코 연대하지 않았으며,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단편영화라는 물리적 특징 이외에는 거의 없다. 그들은 그러면서 동시대의 영화를 만든다. 단편영화는 우리들의 방부제가 될 수 있을까?

단편영화가 미래의 영화라는 말은 우리에게 별로 옳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한국에는 두 개의 영화가 있다. 하나는 장편 극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단편영화이다. 그 둘은 서로 겹쳐 있으며, 단편영화는 장편영화 제도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만일 그것이 싫으면 (기약 없는) 연출부를 해야 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독립영화가 있는데, 이미 단편영화는 독립영화의 진영과 결별한 지 오래이다. 왜냐하면 이미 단편영화들은 자기들의 공개의 장을 찾았으며(수많은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를 찾고 있으며, 일단 ‘뜨면’ 영화제 순례에 나선다), 동시에 그들은 제도권 영화사에서 배급되고 있다. 게다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영화관에서 개봉도 된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놀랍게 변하고 있는 것은 단편영화들이다. 그러나 항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그들의 활로는 거꾸로 그들을 찾고 있는 구조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예고되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영화들의 활로가 그들 자신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깐느영화제에는 98년에 이어 99년에도 네 편의 영화가 찾아갔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98년에는 세 편의 장편(<강원도의 힘>과 <아름다운 시절>, <8월의 크리스마스>)과 한 편의 단편(<스케이트>)이었지만, 99년에는 네 편의 단편영화라는 사실이다. 송일곤의 <소풍>과 김대현의 <영영(永永)>, 김성숙의 <동시에>, 이인균의 <집행>은 서로 전혀 다른 지점에서 영화를 공부하였으며, 자기 영화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 <소풍>이 로돌프 마르코니의 <정거장>과 우수상을 공동 수상했다(단편영화 황금종려상은 캐나다의 우웬디 틸비와 아만다 포비스의 애니메이션 <날이 밝아질 때>가 받았다). 송일곤의 <소풍>은 실직한 가장이 가족들과 함께 동반자살하는 이야기이다. 자살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려는 안간힘을 더 없이 안쓰러운 몸짓 안에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담으려고 한다. 그것은 송일곤이 자기 영화 안에서 스스로 성숙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필리아 오디션>에서 <광대의 꿈>을 거쳐 <간과 감자>에서 영화적 형식에 대한 실험을 거듭해온 송일곤이 만드는 영화적 상상력은 지나치게 서구적 예술 영화의 형식에 기대어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자기의 윤곽을 모색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이상한 쇼크를 주는 것은 김대현의 <영영>이다. 죽은 아들을 기리는 늙은 어머니의 탄식을 담아낸 한여름 낮의 기나긴 한숨 소리는 매미의 요란스러운 자연의 소리와 아른거리는 한여름 낮의 백열로 인해 지워질 듯이 보인다. 그는 미숙한 영화적 수사학을 간결하고도 효과있게 활용한다. 그래서 거의 아마추어처럼 만들어진 이 영화가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진정성에 이르는 것은 그가 자신의 대상에 대해서 갖는 깊이의 작은 울림일 것이다. 김성숙은 제 2회 서울단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블랙홀>이 첫번째 영화작업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첫번째 영화의 실패 이후 기나긴 시간의 잠행은 그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는 손가락을 잃어버린 공장 노동자가 청계천까지 흘러 들어가 복권을 파는 인생이 된 다음에 만난 한 소년과의 이야기이다. 소년은 포르노 테이프를 팔면서 ‘한건 올리면 이 바닥을 떠나고 싶다’ 는 꿈을 안고 살아간다. 아마도 우리 사화의 가장 밑바닥일 이 곳에서 두 사람은 이상한 연대감을 갖는다. 그러나 소년을 대신하여 불법 테이프 단속반에 걸려 남자가 잡혀간 다음 그의 서랍을 뒤지고 돈을 훔쳐 달아나는 소년으로 끝나는 이들의 관계는 절망적이다. 소년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이란 아주 쉽다’ 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은 80년대 운동권 세대의 상실감처럼 보인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불신과 운동의 패배감이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갖지 못한 자들 사이의 먹이사슬이 되어버린 이들 속에서 희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녀가 신념을 버린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가 그토록 시종일관 따사로운 시선을 포기하지는 않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시에>는 단 한편의 영화로 ‘진검승부’ 하는 대신 그녀가 이끌리는 방향에 따라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 속의 영화이다. 그녀는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만든다. 이인균의 <집행>은 사형 집행장에 이끌려온 앳된 소년의 종부성사를 맡은 젊은 신부의 이야기이다. 짧은 소개 이후 사형 집행 직전 집행장에서 진행되는 소년과 신부 사이의 짧은 만남 사이에서 갖는 심리적인 위기와 믿음에 대한 의문, 그리고 죽음 앞에 선다는 것과 공적인 제도의 무자비한 집행에 대해서 아주 은밀하게 질문을 던지는 정성을 들인 영화이다. 조명과 연기는 많은 리허설을 거친 것이 틀림 없으며, 카메라는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잘 교육받은 영화과 학생의 아주 모범적인 영화이다. 깐느영화제 단편영화 부문의 선택은 그에게 주는 작은 격려일 것이다.

베니스영화제는 장편영화인 장선우의 <거짓말>을 경쟁부문에 선택했으며, 전수일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를 ‘오늘의 영화’ 부문에 초대하였다. 그리고 임필성의 <베이비>를 ‘새로운 영역’ 에 놓았으며, 안영석의 <냉장고>를 단편영화 부문에 배치하였다. 임필성은 정치적 문화운동의 물결이 완전히 지나간 다음 (<해피 엔드>의 정지우와 <질주>의 이상인이 활동했던) 독립영화단체 청년에 잠시 머물다가 곧 떠나가서 자기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만드는 영화들은 매우 개인적인 관심사들이며, 다소 자의식 과잉에 가득 차 있어서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영화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비>는 작은 타협점이다. 그는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 소년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자기 영화에 대한 변호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만 골라서’ 글을 써온 박찬욱 감독과는 달리 자신의 영화와는 아무 관계없이 비디오 리뷰를 써 온 과정들), 그의 영화 안에는 영화에 대한 의심이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종종 소재주의와 발빠른 저널적인 관심에 휩쓸리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베이비>가 만일 그의 단편영화와의 결별이라면, 그 모 든 것이 정말로 그저 ‘실습 작품들’ 이었기를 기대한다. 반면 안영석의 <냉장고>는 아주 정직한 영화이다. 그 자신의 영화 아카데미 졸업작품인 이 영화에는 아무런 과장도 없으며, 겉치례 인사말조차 없다. 가난한 달동네 작은 집에 들여온 냉장고 한대가 그들의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아주 조심스럽게 그려낸 영화는 마지막 대목까지 어디서도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편안하다. 문제는 그 편안함 때문에 긴장을 잃고 지루해지는 순간들이다. 그가 일상생활 안에서 드라마에 이끌리지 않으면서 인물들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서 얻어낸 마음의 지혜는 소박하리만큼 작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원한 전부였다면 안영석은 자기가 소망한 것을 얻은 셈이다. 그리고 그 소망을 그 자신이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동안 어떻게 잃지 않는가,라는 문제가 계속해서 그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단편영화들은 정말 동시대 안에서 그 모두와 함께 경주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일까? 첫번째 대답.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 세계 영화의 관심은 점점 더 장편영화로 옮겨가면서 단편영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70년대 후반 홈 무비의 도입과 함께 열린 단편영화들의 백가쟁명과 80년대의 선댄스를 중심으로 한 신화들의 열기가 지나가고 디지털로 장편영화에 도전하는 신인들의 새로운 전략방식과 함께 단편영화는 어제와 같은 격전지가 아니다. 그래서 단편영화의 경주 트랙은 매우 좁고 손쉬운 무대가 되었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단편영화를 만든다면 그들에게는 다음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97년 클레르몽 페랑 집행위원의 인터뷰에서“지금 단편영화 전체의 수준이 날로 떨어져서 이제는 아마추어와 시네아스트의 구별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는 의미심장한 지적). 두번째 대답. 아닐 수도 있다. 단편영화 감독들은 ‘너무나도’ 장편영화 감독이 되고 싶어한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단편영화가 습작이라기보다는 영화제에 나가서 주목을 받고 ‘세상에 이름이 떠서’ 장편영화 제작자를 ‘잡을 수 있는 기회’ 의 전략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가장 끔찍한 함정이 될 것이다. 우리들의 단편영화는 지금 도약중이다. 일부는 살아남고, 미안하지만 대부분은 잊혀질 것이다. 그 안에서 단편영화가 장편영화를 축소한 작은 도박판과 같은 곳이 되지는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