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2000.09.에디토리얼|엔드크레딧

영화에서의 우정에 관한 제안
우리들이 상상하는 새로운 공동체

「키노」9월호는 리좀처럼 뻗어 나가는 만남입니다. 그래서 사방에서 만나고,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이루어내는 새로운 공동 운명체의 믿음입니다. 그렇게 지난 10년간의 한국영화를 돌아보고, 바깥의 동세대들 안에서 만들어지는 시네아스트들의 영화를 둘러보고, 그 안에서 2001년에 만나게 될 시네아스트들을 기다립니다. 우리들은 전진합니다.

키노의 세 번째 진술에 관한 (지난달에 이은) 두 번째 대답. 우리들이 영화를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언제나 친구들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오해받지 않길 바랍니다. 이 말은 (언론학자 강준마씨가 우리에게 쳐부수어야 할 개념이라고 가르쳐준) 패거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와 '우정'이라는 말을 끌어들이는 순간 우리들이 마음속에 담아내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우정을 만들어가는 친구들이라는 오래된 철학에서의 사유의 동아리들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방식으로서의 우정에 대해서 생각해왔습니다.「키노」가 어렵다는 지적은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서 그저 단순하게 요약된 정보만을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그 반대로 종종「키노」를 읽다가 멈춰세우고 스스로 영화를 돌이켜 생각해보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키노」가 받아온 많은 지적 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친구들과의 우정을 중요시한 까닭에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또는 그 만남을 좀 더 넓혀야 한다는 충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달에 이어서 우리들이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영화의 90년대에 관한) 앙케트를 구한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먼저 말하자면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들은 앙케트에 대답한 분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종종 거기에서 우리들과 반대의 견해를 가진 분들의 대답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에게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동세대의 한국영화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아직 시간이 이르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난 10년을 다시 생각해보는 까닭은 이제부터 시작할 한국영화의 새로운 세기를 향한 좌표를 설정해보고자 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믿음 때문에 반성의 사유만이 새로운 것에 대한 출발이라고 설정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영화들의 도표를 작성해봅니다. 지금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네아스트들과 스타들은 어떤 영화를 갖고 2001년에 돌아올 것인지에 대한 궁금함과 그 대답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 단초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화에서 새로운 영화들을 생각하면서 세상이 이루어져 가는 방식을 보는 것입니다. 영화가 세상에 대한 반영이며 그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소망이라는 그 두 개의 힘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영화에 대한 기대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구체성의 한 가지 형태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로 질문은 돌아옵니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디서 새로운 상상력을 얻어갈 것인가? 그 질문을 새로운 신인감독들과 함께 나누어 봅니다. 그들이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예상도 할 수 없이 기습적으로 나타난 전적인 단절감으로 기대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언제나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에서 숨어 있다가 갑자기 이 모든 우리들의 영화적 상상력을 점핑시키는 단절의 힘이야말로 세상과 영화가 관계를 맺는 가장 창조적인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경계하는 것은 진부해지는 것입니다. 진부해지는 것은 우리들이 안주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안에서 알게 모르게 보수적인 방식으로 이미 얻은 힘을 즐기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진부해지는 것은 동시에 세상의 동시대로부터 점점 더 이탈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경계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새로운 것을 향해 무한정한 사랑을 바치는 것은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현실의 모순으로부터 결코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안에서 영화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작정입니까? 또는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반성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상상합니까? 혹시 허깨비에 홀리듯이 영화를 보면서 그저 화면에서 펼쳐지는 신기한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들은 그것을 물리쳐야 합니다. 또는 그 안에서 죽어가는 영화를 구출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의 힘만으로 부족하다면 친구들의 도움을 구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이번 달에 더 많은 친구들과 만나는 이유입니다.


그루브 아마다『현기증』

기분 좋게 펼쳐지는 이 그루브한 사운드의 풍경화 속에서 만나는 것은 그 무엇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이상한 음악적 하이브리드의 스타일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스타일만이 중요하다. 의미가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이 의미를 결정한다. 의미가 없으니까 그 안에 자신이 이끌리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들은 텅 빈 의미들이 만드는 스타일의 허무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의미의 죽음은 새로운 테제가 아니다. 하지만 의미 없이 우리들의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토 다다오「한국영화의 정신」

사토 다다오는 일본 영화평론가 중에서 가장 먼저 한국영화를 발견한 사람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임권택 감독을 발견하였고, 그 안에서 확장된 관심을 갖고 밀고 나아가서 한국영화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는 임권택 감독을 중심에 놓고 한국영화의 성좌관계를 그려 나간다. 그 안에서 이상할 정도로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나이 든 일본영화 평론가가 보여주는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한국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아시아영화를 말한다. 극러 제국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이제는 정말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자화상 2000> 이상열 감독

두 편의 단편영화가 올해 베니스영화제에 간다. 이상열의 <자화상 2000>과 하기호의 <내 사랑 십자 드라이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 단편영화이다. 한 사람은 온전하게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만들어냈고, 또 한 사람은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전적인 도움으로 자기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부터 시작하는 영화들의 두 가지 경향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며, 그들을 통해 우리들의 영화가 나아가는 방향을 상상해볼 것이다. 우리들은 결국 그들이 서로 만나 함께 영화를 만드는 21세기의 우정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end CREDIT

내가 가장 힘든 瞬間은 完全히 엉터리 映畵인데도 모두가 緘口無言 하는 瞬間이다. 이 자리는 映畵를 批評하는 자리가 아니니 일단 題目과 監督 이름은 접어두기로 하자. 이번 달에 정말 한심한 映畵를 보았다. 俳優들은 臺詞를 말하는 대신 읽느라 급급하고, 그 臺詞도 도무지 生硬하기 짝이 없는 哲學的 深奧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雰圍氣가 深刻하지만 않았다면 올해 가장 웃기는 臺詞로 뽑고 싶을 程度이다. 그런데 진짜 코미디는 그 다음이다. 이게 엉터리 映畵라는 건 누가 보아도 너무나 뻔한데 週末 映畵欄의 映畵擔當記者들께서는 眞摯하기 짝이 없는 質問을 하고, 게다가 거의 말장난 水準의 評이 그 곁에 따른다. 차마 映畵가 좋다는 말은 못하겠고, 顔面상 나쁘다는 말은 못하면서 紙面상 나쁘다는 말은 못하면서 紙面을 메꾸는 作文 實力은 新聞社 入社가 네번째 考試라는 말을 實感케 한다. 나는 法廷 用語들과 醫師들의 處方箋을 보면서 늘상 그 暗號文에 感歎을 하는 편이다. 映畵擔當記者들도 닮아가고 있다. 그런데 (新聞放送學을 專攻한 내 생각으로) 映畵記者에게서 映畵와 記者 중의 하나가 더 중요해야 한다면 당연히 記者이고, 記者의 生命은 '事實'이라고 19年 前 一學年 一學期 첫 時間에 배웠다. 하기사 生命을 擔保한 히포크라테스들도 막가는 판에 映畵 쯤이야 韓國映畵産業을 위해서 그 정도야 눈 감아주지 못하랴(이하 本文과 관계 없음). 요즘 流行하는 DJ DOC 歌詞다. 씨팔, 씨팔. 조까라, 씨팔, (건너 뛰어서)...온갖 짭새가 날아드는구나. (역시 진솔한 말은 한자가 필요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