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2001.08.영화이야기

Video2001  八月夜話  Actualité

나  는     어 찌  하  여    영  화

속  에  서     다  른     영  화 를    꿈  꾸  는  가  ?

영 화 광 들 의  불 면 증 을   위 한  미 네 르 바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영화를 보고 비디오를 보고 DVD를 본다. 그런데 혹시 이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 또는 남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려는 욕망의 산물이 아닐까? 영화를 안다는 것은 본 영화와 보지 않은 영화로 나뉘는 것은 끔직한 일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이 아는 자들에 비하여 영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숨은 비디오에서 제시되는 목록은 함께 대화해야 할 대상에 대한 것이어야지 그것이 본 영화의 편수를 늘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행위 자체에 저항해야 한다. 한편의 영화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라. 그리고 보지 못한 영화를 아쉬워하지 마라. 신세기 첫 번째 미디오 야화를 위한 제언.

정성일(영화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 · · 안젤레나 졸리가 나오는 <툼레이더>를 보았다. 영화는 환상적으로 지루했다. 얼마나 지루한지 나로 하여금 <진주만>과 <슈렉>과 <미이라2>와 <쥬라기 공원 3>(그리고 한참을 더 이어질 목록들)을 감히 볼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젤레나 졸리는 물론 게임「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의 분신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라라 크로포트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F 수퍼 컵 사이즈의 라라 크로프트를 따라잡기에는 안젤리나 졸리의 C컵 110 사이즈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와 영화사는 게이머들과 D컵 미디엄 사이즈로 타협보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게임보다 지루했고, 영화관은 고작해야 모니터 화면만 늘어놓은 채 오리지널 게임을 조잡하게 카피한 대만제 해적판「툼레이더」같았다. 나는 라라 크로포트가 두 번째 번지점프를 하는 순간 그녀의 점프와 함께 잠에 뛰어들었다.

아우얼바하에 의하면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와 마치 낯선 손님인 것처럼 분장한 채 그의 아내 페네로프의 눈에 들어 페네로프가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되고, 그래서 늙은 가정부 유레클레이아가 그의 발을 씻어주려다가 상처에 손이 닿자 불현듯 그가 바로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중단되고, 왜 그 상처가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전과 후 40행에 걸쳐 늘어놓기 시작한다. 지연의 요소라고 이름지어진 이 문학적 기법은 오늘날에는 차라리 사방에 늘어서 있는 작품들 사이에서 매번 그것이 떠올리는 아우라를 따라 앞과 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만들어내는 성좌 그리기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은 수다이기는 하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현재나 기원에 대한 죽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로 부터 풀려나와 그것이 경계로 설정한 문턱을 슬금슬금 넘어서면서 일종의 꿈결처럼 다른 입구를 찾는다는 사실마저 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작품이 만들어내는 해석의 절대적 수동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술래잡기를 벌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이미 다른 영화를 생각하는 것은 내가 눈앞에 보이는 영화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이란 생존이 아닐까? 그래서 그것이 살아서 언제나 현재성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 없는 방황은 위험하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 염려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먼 길을 돌아서 결국에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종류의 꿈꾸기에서 정보만을 가져가려는 경향이 있다. 혹시 거기에는 내가 보지 못한 영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영화제목이나 감독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면 이 글은 아무 것도 충족시켜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툼레이더>를 보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고(너무나 환상적이어서!), 그래서 그냥 다른 생각에 잠겨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생각의 시작은 라라 크로프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지식의 체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잡다한 외곽으로 이끌려가고 있기 때문에 교차점으로부터 나는 점점 더 밀려날 것이다. 이것은 그런 의미에서 통과이며, 그 안에서 여행하는 것이며, 나침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련은 경험을 매개로 한 것이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는 경험으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기억 속의 추억을 뒤쫓으려는 것이다. 나는 라라 크로프트와의 여행을 포기했으며, 그래서 그 이야기 바깥으로 나와 번지 점프하는 라라 크로프트의 손을 놓아버리고 추락하는 대신 상공비행한 셈이다. 어린 왕자는 앨리스와 함께 여행할 수 있을까? 생떽쥐베리와 루이스 캐롤이 서로 갈라서는 지점은 어디일까? 이것을 순전히 모형상의 친화성이라는 이유로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수 없는 법이다.

· · · · 첫 번째 모델. 르네 알리오의 <코미짜르>는 이상하게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걸작이다. 이 비범한 영화는 이미 푸코가 격찬한 바 있다. 농민들이 봉기하여 부르주아들과 싸우다가 전원 몰살당한 이 영화의 주제는 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멸에 있다. 르네 알리오가 정말로 있었던 이 농민봉기를 다루면서 그려내는 것은 그들이 거의 소풍하듯이 전원을 계속 걸어다니는 것이 전부이다. 물론 곡괭이와 낫자루를 들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들은 몇몇 시시한 전투를 치룰 뿐이며, 그들이 전멸당한 것은 마지막 자막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그들의 전멸을 다루는 척하면서 사실은 내부에서 이미 붕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로셀리니의 제자라고 불러야 할 르네 알리오의 무심한 시선의 리얼리즘은 그것이 지나치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마치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말이지만 로셀리니의 <파스칼>은 위대한 영화이다. <무방비도시>나 <전화의 저편>보다 훨씬 더 시적인 감흥을 이끌어낸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 여행> 이후 로셀리니가 즐겨 다루어온 무심한 시선을 인물과 사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자연에로 밀고 나아간다. (그러니까 <파스칼>은 이 모델의 최상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로셀리니는 갈대와도 같지만 그가 없다면 의미가 사라질 자연의 폭력적인 냉담함과 인간의 약한 존재론 사이에서 영화가 중재해야 할 자리를 찾기 떄문이다.

· · · · 모델의 전형. 그런데 르네 알리오의 영화를 사람들이 힘들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단순한 것은 그 기대감이다. 이 영화는 봉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좌파들은 부르주아들과의 격렬한 전투장면을 원한다. 같은 이유로 관객들은 어찌 되었건 전투장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는 같은 것을 <아니오, 또는 지휘관의 헛된 영광>에서 해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전투 장면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보여지는 마지막 장면과는 정반대 의미에서이다. 이 전투장면은 마치 서 있는 쇼트의 모델들 사이에서의 충돌과 같다). 그래서 영화에서 피비린내가 넘쳐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의 가장 강력한 힘을 오해한 데서 오는 것이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지루한 예술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사람들을 두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지루하게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5분 동안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들게 생각한다. 가만히 있는 순간은 잠을 잘 때뿐이다. 그 사람들을 가만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눈만 뜨고 의자에 앉아 있게 만든다. 영화를 재미있게 만든다고 온갖 사건을 버무려 넣고, 그 안에서 사건을 만들고, 호화찬란하게 만들 때 이미 영화는 자기의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대가들이 점점 더 그의 카메라를 멈추거나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거기 그렇게 서서 종종 우두커니 서 있는 순간은 그들이 영화와 세상 사이의 관계를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간을 들뢰즈는 영화의 자유간접화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말이 그저 단순히 카메라가 멈춰 서 잇다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의 감정을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소파의 고정점이라고 불리는 것을 마련하여 우리로 하여금 기대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누구보다도 장 외스따쉬의 <산타 할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다>를 떠올린다. 또는 고슈 헤이노스케의 <굴뚝이 있는 풍경>도 상관없다. 전혀 다른 영화이지만 이들이 주는 감동은 같은 것이다.

· · · · 모델의 반복. 몇몇 친구들은 같은 영화를 보아도 어디에서도 읽지 않은 견해를 가르쳐준다. 이를테면 김소영 씨는 그런 친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학교 선생님일 때보다 영화를 연출하고 난 다음부터 훨씬 영화를 새롭게 본다. 사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대부분의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 가장 지루한 순간은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의지해서 방금 보보 난 영화를 말할 때이다. 그런데 그녀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의외로 리들리 스코트의 <한니발>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좀 당황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영화가 매우 지루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지루했다는 뜻은 내가 거기서 나를 움직일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네 그 영화에 대해서 호의적이라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그녀가 발견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그런 영화들이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제까지 모든 히치콕에 관한 담론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본다. 또는 지젝은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대해서 자기에게 부정적인 것만을 발견한다. 미셀 시옹은 데이빗 린치에 대해서 누구와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영화를 갖는 것은 자기의 몫이다. 그 누구와도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는 영화나 감독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영화 애호가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이를테면 에드 우드에 대해서 팀 버튼은 정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아오야마 신지가 고다르에 대해서 말할 때 귀기울이게 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 최괴의 오즈 영화 팬이다. 로빈 우드는 히치콕 영화에 대해서 그 누구와도 다른 애호가이다. 바쟁은 장 르노와르의 최상의 반려자이다. 또는 바쟁은 오손 웰즈나 윌리엄 와일러, 또는 루이스 부뉴엘에 대해서 그러하다. 파스빈더의 모든 영화는 더글라스 서크에 대한 주석이다. 말하자면 당신의 목록은 당신이 남의 견해를 암송할 때가 아니라 그 누구와도 다른 견해를 지닐 때 진정 서로 함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을 뒤집어쓴 그 어떤 다른 인물의 복화술사가 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영화는 보기 싫은 데 아는 체를 하기 위해서 영화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은 음악을 듣기는 싫은데 명반 목록을 외우고 있는 것과 같은 짓이다. 나에게 점점 새로운 견해를 가르쳐주는 새로운 영화가 부족해지고 있는 것은 내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 부족함 속에서 지아장커의 <소무>와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 또는 윤종찬의 <소름>과 김기덕의 <수취인불명>은 고마운 영화들이다. 영화가 내게 아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 나는 영화적으로 죽은 것이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그 미메시스에 대한 자아의 해석을 불러일으키기 못한다면 당신은 이미 영화관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가 위대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남의 입을 빌어 말할 때, 그래서 그 누구의 견해와 유사하게 될 때, 그것은 브레송의 영화가 진정으로 당신의 영혼을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또는 같은 브레소을 말할 때조차 같은 영화가 당신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레송 영화는 <블루뉴 숲의 귀부인들>이다. 대부분의 브레송 전문가들이 이 영화는 아직 브레송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이 영화에 끌린다. 특히 마리아 카자레스의 클로즈업 얼굴). 그러니까 그 어떤 영화가 당신을 이끌 때 진정으로 그 영화를 향하여 그것에 대한 고유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에 관한 일반 지식을 갖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해야만 한다. 만일 자기에게 이끌리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가로막은 채 자꾸만 남의 지식에 귀 기울일 때에 이미 그 영화에 대한 지식은 고작해야 개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 주성치 영화를 가져다 놓더라도, 중요한 것은 자기의 견해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조차 남의 견해에 매달리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

· · · · 두 번째 모델. 요시다 요시시게의 <감옥 에로이카>는 굉장하다. 일본 60년대 영화들은 요즘 다시 생각하고 있는데, 배울 점이 많다. 특히 그들이 사법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 영화가 문제의 토픽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배울 만하다. 이를테면 이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법정에 섰을 때 정말 정치적이 된다. 대부분 한국에서의 영화적인 투쟁은 사법의 영역 안에서 진행된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고발당하면, 대부분 법의 테두리 내에서 자신의 예술적이며 표현의 자유의 테두리 내에서 만들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60년대 일본영화는 고발당하면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반문한다. 그런데 왜 그게 문제가 되는가? 이를테면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가 보안법에 저촉되었다. 그러자 오시마는 법정에서 진술했다. "맞다. 이 영화는 빨갱이 영화이다. 그런데 왜 그게 문제가 되는가?" 60년대 일본영화의 전술은 여기에 기대고 있다. 또는 이것이 이 시대 일본영화의 예술적 진정성이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실험정신이 불장난에 빠지지 않은 까닭이다.(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만들어지는 한국의 디지털 영화들의 대부분은 테크놀로지와 벌이는 불장난처럼 보인다) 요시다 요시시게의 영화는 전위정당을 세우기 위해서 미국 대사를 유괴하려는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셀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처럼 만들어나간다. 감히 이 영화에 견줄 만한 영화는 (신기하게도 같은 해에 만들어진) 글라우베 로챠의 <죽음의 안토니오>이다. 광기에 가까운 흥분과 화면에서 넘쳐나는 이교도적인 영화적 배반, 그 어떤 규칙도 인정치 않는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영화를 그저 빌려와 다른 모든 것을 담는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영화는 이상한 방향으로 선회한다. 영화를 말하기 위해서 종종 영화는 비영화적인 곳에서 자기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 장소에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 · · · 첫 번째 모델의 반복; 그러니까 영화를 좀더 잘 알기 위해서 영화에만 매달리면 그 영화의 드러난 것 이외에는 별달리 할말이 없다. 데이빗 보드웰과 그의 위스컨신 학파의 글들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영화 이외에는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이를테면 그의「영화 스타일의 역사에 관해서」같은 책). 영화는 우리에게 그로부터 이끌어낸 다른 것을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재미있어지는 것이다(이를테면 로마 마크스의「영화의 피부」). 그러니까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대단한 예술이 아니다(세르쥬 다네와 자끄 랑시에르의 말). 그러나 영화가 표지판을 세우고 자기가 세운 경계를 차례로 넘나들며 실천적으로 차이를 지워나가기 시작할 때, 그래서 그 운동의 선을 따라 나서면서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한 관념적인 대상들을 유물론적 텍스트로 만들어줄 때, 그 안에서 우리들은 창조적인 개념의 변증법적 집합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 · · · 두 번째 모델에 대한 주석. 이를테면 난니 모레띠를 단숨에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적어도 <4월>까지는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영화 <아들의 방>이 변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확신은 없다. 적어도 97년까지는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는 영화를 세상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달리 후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가 왕가위를 완전히 뛰어넘은 걸작이라고 생각한다(그런데 왕가위의 <화양연화>는 후 샤오시엔의 <해상화>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매우 긴 글로 답변해야 할 것 같다). 후 샤오시엔은 여기서 테크노 영화라고 불릴 만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해 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수없는 반복 속에서 변주되어 가는 방식을 통해 인물들의 변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미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현재를 과거 시제로 만들고 거기서 갈래지어 나온 이야기를 변주하기 시작한다. 이미 주제-이야기는 결정되었고, 계속해서 다시 원래의 이야기에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변주된다. 인물들은 이 영화 속의 비트들이다.

· · · · 세 번째 모델. 숨은 비디오를 찾는 일에서는 먼저 숨었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숨은 것은 그것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숨은 것을 찾아내는 행위는 이미 시장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종의 실천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기에는 관념의 위험이 있다. 이 실천이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장의 이중구조에 빠져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환원될 수 없는 숨바꼭질 속에서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거기서 시장의 규칙이 왜 영화에서의 예술의 다양성을 억압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계기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불균형이기 때문에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비디오를 찾는 일을 사람들은 절대적 외부 안의 숨은 보물창고처럼 생각한다. 창고라는 개념에 사로잡히는 것은 스스로를 목록의 감옥에 쳐 넣는 행위이다. 정보사회라고 불리는 시대가 무시무시한 것은 자발적으로 감옥에 갇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비디오를 관리하면, 비디오에 매달리는 애호가들을 관리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은 비디오를 찾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밀결사단체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옥 안의 수인이 되지 않으려면 이 비디오를 바깥으로 끌고 나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인 담론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는 채팅 상의 영퀴방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 탐미주의나 자기애로 빠져드는 것은 문화적 나르시시즘이다. 또는 나만이 알고 싶다는 유혹은 독점자본의 논리에 대한 심리적 전이이다.

· · · · 다시 첫 번째 모델에 대한 보충(세 번째 모델에 연관지어서).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목록과 마주쳐야 한다. 영화 애호가들은 왜 점점 새로운 영화에만 매달리고 이미 지나간 영화를 돌아보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동시대성이 지니는 감탄과 매혹, 경배 또는 숭배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집단적인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곽경택의 <친구>를 불러들이는 것은 그 어떤 다른 영화를 끌어들이는 것보다 서로에게 공동의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영화가 지니는 역사에 대해서 완전할 정도의 무관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심지어 80년대 한국영화들에 대한 무관심. 또는 <시민 케인>이나 <전함 포템킨>, <게임의 규칙>, <낯선 귀부인으로부터 온 편지>, <우게츠 이야기>, <리오 그란데>를 이야기하는 순간 갖는 거부의 태도). 그것은 영화를 일시적인 유행의 담론으로만 받아들일 뿐이지, 그것을 통하여 영화가 불충분하지만 오히려 그 불충분성을 인정함으로써 사회와의 관계를 통해 예술적으로 말하는 것에 관해 포기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안다는 것이 본 영화와 보지 않은 영화로 나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서방세계에 비해서 영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숨은 비디오에서 제시되는 목록은 함께 이야기해야할 대상에 대해서이어야 하지 그것이 본 영화의 편수를 늘리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해우이 자체에 저항해야 한다.

· · · · 네 번째 모델. 그래도 목록이 제시되어야 한다면 나는 이런 감독들의 영화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에른스트 루비치와 조셉 폰 스턴버그. 이들의 영화는 이제야 비로소 올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루비치의 웃음과 스턴버그의 비극은 동시에 바로크적인 것이다. 즉 그들은 고전적인 것과 모던한 것을 동시에 바라보게 만든다.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더글라스 서크와 막스 오필스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영화에서의 통속성 안에서 이미 주어진 물로서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승화와 그 실패를 다루는 것뿐만 아니고, 오히려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가 대상에 대한 개념을 다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거의 모든 것을 다 써버린 듯한 영화에서 이들은 그것에 대한 재활용으로서의 전복을 끌어들인다. 그 점에서는 장 엡스탕의 영화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엡스탕은 영화를 거슬러 올라가 영화의 고정점으로서의 사진이 갖는 이미 거기를 통해 지금 여기의 영화를 이미지로 중재하려고 한다. 그의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벤야민적이다. 그래서 영화가 분산되어 있지만, 그 분산을 통하여 아우라가 파괴되고 있지만, 왜 영화는 그러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으로서 다른 역사를 상상해 보는 영화를 만든다.

니콜 브레네즈가 엡스탕의 영화를 울트라-모던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모던에 대한 초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상하게 충분하게 이야기되지 않은 영화는 오토 플레밍거의 작품들이다.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그래서 완전히 새로이 영화사를 쓰면서, 최초의 영화라는 오토 플레밍거의 <로라>를 말하고 있다. 오토 플레밍거는 여기서 앙리 랑글로와의 시네마떼끄적인 연상작용의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 또 그는 산문체 영화의 서술방식을 만들어냈다. 플레밍거의 영화를 보다가 최근에 가장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와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가 사실은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독백하는 영화를 만든다. 바흐친이 보았다면 탄식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야콥슨이 보았다면 긲이 찬사를 바쳤을 것이다. 토드 브라우닝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다. 그를 그저 드라큐라나 프랑켄슈타인을 영화에 끌어들인 사람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영화에서 판타스틱이라는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기형성과 괴물성을 통해 인간의 형상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 영화에서 인간과 고기, 더 나아가 인간의 윤곽과 그 윤곽의 경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빈센트 미넬리의 영화를 회화적인 것으로 오해한 편견을 떨치면 거기서 히스테리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미넬리는 영화를 통하여 색채가 분리를 불러일으키는 자아의 부적절한 방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미넬리는 알랭 까발리에의 스승이다.(그리고 이 목록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 · · · 일렬로 늘어선 행성에서 엔 마이너스 일. 라라 크로프트는 벌써 자기의 임무를 해치웠다. 다행히도 속편은 안 나올 것 같다. 사실 진짜 속편이 궁금한 것은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이다. 미셀이 죽고 난 다음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트뤼포의 <쥘과 짐>에서 쥘은 까트리느와 짐이 동반자살하고 난 다음 딸과 어떻게 살았을까?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에서 두 소년은 무엇으로 다시 시작했을까?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녀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왕가위의 <중경삼림>에서 햄버거 집 소녀와 경관은 결국 결혼을 했을까? 내가 알고 싶은 속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것이다. 보지 못한 영화를 아쉬워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