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소식』 1993.06.09.작품

독립 통일의 현실을 환상극으로 연출
빔 벤더스 감독의『베를린 천사의 시』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는 피할 수 없는 내기를 건다. 그건 영화광의 순진한 애정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우선 자기비판! 지금까지 필자가 쓴 이 영화에 대한 모든 평은 틀렸다. 이건 결코 걸작이 아니며, 심지어 역겨운 파시즘의 냄새가 난다. 이 영화를 14번 볼 때까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잘못이지만, 그 다음으로 이 영화가 영화광 코뮤니티 속에서 부당하리만큼 열광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일체의 비판을 금지하는 기묘한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 여기저기 숨어있는 이상한 자기도취의 흔적들과, 이미『파리/텍사스』이후 벤더스가 보여준 그 이율배반적인 태도들은 이제 증거가 잡힌 것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1987년 베를린에서 완성되었다. 이미 독일 통일 (말이 좋아 통일이지 이건 강제적 합병이다)은 서독 기업들의 후원 아래 정치적 쇼를 거쳐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버마스는 독일의 통일이 가져올 포스트 포디즘 경제주의의 속셈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였고, 크라우스 오페는 이것은 경제주의 나치즘이라고 탄식하였으며, 상탈 무페는 역사상 가장 포장이 근사한 사기극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여기서 시네아스트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분명 빔 벤더스는 분단 베를린에서 통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건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그는 그 어느 때 보다 독일인이 되어서 (생각해보라, 70년대의 헐리우드 앞잡이었던 벤더스의 어리광을!) 통일을 말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 질문, 벤더스는 누구의 편인가? 그는 현실을 보기 두려워하며 환상으로 빠져든다. 그거야 벤더스의 영화를 조금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점칠 수 있다.

그런데 그 환상극을 연출하기 위하여 벤더스는 놀랍게도 나치시대의 그 휘황찬란한 제3제국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는 공공연하게 첫 장면의 나레이션이 끝나자마자 죠르죠 데 키리코의 건축양식을 본딴 건물 위에서, 또는 스탈린주의자였던 보리스 이오판의 동상양식에서 가져온 화면 위에 천사를 올려 세운다. 그는 그 위에서 인간들의 운명에 관해서 기록하고, 그리고 마음의 소리를 '훔쳐' 듣고, 심지어 아무런 근거없는 희망을 심어준다. 그들은 베를린 시내를 돌아다니며 질병을 전파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 전파의 과정은 소름끼칠 만큼 편견에 가득 차 있다. 고통스러운 자들은 중산층과 그리고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그러나 사회보장제도가 되어 있는 계층이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아, 화면에서 사라진 자들이여, 고의적으로 쫓겨났으나 늘 거기에 있는 자들이여, 모든 독일인들의 마음 속의 증오의 대상인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이 아닌가! 벤더스는 그들을 화면에서 몰아내고, 그리고 없는 자리에서 분노를 부추기고 황당무계한 희망을 전한다. 페터 한트케의 그 잘난 체 하는 고상한 단어들이 얼마나 많은 비수를 숨기고 있는가? 그건 현실에서만이 아니다. 벤더스는 심지어 2차대전을 영화촬영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현실과 역사는 독백과 지어낸 이야기가 된다.

가장 끔찍한 장면. 꿈에서 마리온(설베이그 도마르탱)이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즈)과 만나는 순간 천사는 마치 바그너의 오페라에서처럼, 보탄의 기사처럼 갑옷을 입고 다가온다.

이것은 사랑을 빙자한, 통화를 빙자한, 관객모독(!)인 것이다. 그러나 이 뻔한 게임을 우리는 왜 그토록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첫째, 한심하게도 우리는 자신들이 마치 서구의 지식인인양 허장성세를 부린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경계해도, 아무리 걸려도 면역이 되지 않는 질병이다.

둘째, 벤더스는 아주 훌륭하게 영화적으로 완성시켰다. 영화적이라는 이 말은 영화광들에게는 정말 물리치기 어려운 조건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역사 위에 영화가 있으며, 세계의 중심이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빔 벤더스는 우리 시대의 레니 리펜슈타르였던 것이다.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