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소식』 1994.03.30.작품

깨달음이 돋보이는 일종의 선언문
샐리 포터 감독의『올란도』

우선 진지한 충고. 페미니즘은 일종의 전선이다. 그런데도 사방에는 일시적인 유행에 몸바치는 말장난에 가득찬 동조자들이 줄을 서고 있다. 로라 멀비나아네트 글을 서둘러 '인용'하고 있는 글은 많지만, 엘렌느 시크스나 뤼스 아리가라이, 가야트리 스피박을 깊이있게 동세대적 연대(!)로서 '읽고'있는 글은 정말 만나기 어렵다.

두번째, 페미니즘은 이론이나 평론같은 '안전한' 말싸움 따위를 위해서 봉사할 여유가 없다. 이것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 내려온 억압에 대한 구조 전체를 바꾸려는 '실천' 프로젝트이지 강단 계몽주의 같은 한가한 테이블 위의 리포트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루하고 앞 뒤가 맞지 않으며 잘난 체 하는 아카데미 안의 소모적인 페미니즘 강의를 백번 듣는 것보다는 샐리 포터 감독의『올란도』를 진심으로(!) 한번 보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샐리 포터의 야심은 역사기술(historiography)에 대한 남성적 사고의 해체이다. 종종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해방이라는 명제 앞에서 싸우고 있는 자신의 토대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것을 잊어버리곤 하는 것과 반대로 그녀가 해체의 전략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이중적인 기능을 하는 교환으로서의 소유권 문제이다.

이 영화는 1922년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런던의 브룸스버리 그룹에서 만난 '여류' 소설가이자 정원 디자이너인 비타 색조빌 - 웨스트를 만나 그녀에게 연애(!)편지 형식으로 보낸 소설 <올란도>를 70년만에 '여류' 감독 샐리 포터가 영화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올란도』는 세 여자 사이의 관게 속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정신적 동맹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주 기이한 이야기이다. 17세기 초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올란도(틸나 스윈턴의 '여자 남자'로 시작함)는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시를 바친다. 그리고 여왕은 그에게 답례로 호화저택을 하사하면서 주문같은 말을 남긴다. 시들지도, 죽지도, 자라지도 말거라.

그때부터 올란도는 성장을 멈춘다. 그리고 남자로서 1600년(죽음), 1610년(사랑), 1650년(시), 1700년(정치), 그렇게 100년을 살아간다. 그러나 여자의 배신과, 예술가로서의 좌절과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남자이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6일밤 6일 낮을 잠든 후 7일째 깨어나 (성서적 메타 내러티브로서의 부활)여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1750년(사교계), 1850년(성), 그리고 탄생으로 이어지며 남자로 살아갈 때 문제되지 않았던 재산 소유가 그녀에게 심각하게 사회적 존재 자체를 질문하게 만든다.

왕실에서 온 관리가 여자 올란도에게 하는 말, 이제 더 이상 상속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되었고, 그리고 남자 올란도는 법적으로 사망처리 되었습니다. 사실 둘 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올란도는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버린다. 재산과, 사랑을 포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딸을 보며 미소 짓는다. 이젠 행복하단다.

올란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남자보다도 더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여자는 소유의 관계로부터 해방되면서 비로소 얻은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이며 격렬한 저항의 자기성찰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 '천사와 올란도와 그녀의 딸이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로서의 페미니즘'은 그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하리만큼 과격한 것이다.

  『올란도』는 한편의 영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선언문이며, 이제 페미니스트 영화가 주변부의 실험영화가 아니라 자신있게 중심영화로 뛰어들어 대중들에게 하소연하는 90년대의 '경향'이 되었음을 자신있게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