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1993.04.추천리스트

현실보다 더 현실을 파헤친 영화들

매스컴의 생리 고발한「뜨거운 오후」

"그게 죄가 될 줄은 몰랐어요."

이건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게 범법행위인 줄 모르는 어르신네(!)들과 함께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쩌면 정말 몰랐을지도 모른다. 입학시험을 면제받고 돈 내고 들어가도 잘못이 아니라는 교육제도 속에서 모르는 것이 어찌 법뿐이랴.

그래서 답답한 마음 부둥켜안고 영화나 보며 현실을 잊자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 현실을 보아야만 한다. 여기 뽑은 비디오 리스트는 현실에 다가서려는 영화들,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을 파헤친 영화들이다.

「뜨거운 오후」(서륭)는 가슴 섬뜩한 어느 날 오후의 이야기이다. 어느 무더운 날(이 영화의 원제가「Dog day afternoon」이다. 삼복더위 오후라고나 할까?) 브루클린 한복판에 있는 은행에 갑자기 무장강도가 침입한다.

처음에는 3인조였지만, 한명은 무서워서 달아나고 두명만 남아 은행직원과 손님들을 인질로 잡는다. 하지만 엉성한 솜씨에 초보가 분명한(?) 이 아마추어 강도들은 그만 비상벨 때문에 긴급 출동한 경찰들에 포위당하는 신세가 된다.

경찰들은 철통처럼 포위하고 이제 너희들은 포위당했으니 자수하라고 마이크로 방송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도착한 것은 텔레비전 방송국의 중계차로, 생방송 중계를 시작한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뜨고, 구경꾼들이 모여든다. 무덥고 짜증스러운 오후에 '이게 웬 구경거리'하며 뉴욕시민들은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이제 거꾸로 이 2인조 무장강도들은 안절부절해지기 시작한다.

잔인한 일은 그 다음이다. 매스컴은 두 무장강도의 인적사항을 뒤지고, 그들은 부모와 이혼한 아내까지도 끌어내서 기어이 카메라 앞에 앉힌다. 두 사람이 동성연애 관계이며 성전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벌인 범죄라는 것도 모두 밝혀진다.

이 불쌍한 2인조 무장강도를 알 파치노와「대부」에서 그의 형으로 나온 존 카잘스가 믿을 수 없는 명연기로 펼쳐 보인다. 영화는 마치 기록영화처럼 냉철한 관점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범죄자를 내세워 그들을 덫에 걸린 쥐를 보듯이 끝까지 지켜보며 감시사회의 잔인한 쾌감의 소비구조와 매스컴 사이의 관계를 단숨에 칼로 자르듯 보여준다.

영화는 결국 FBI의 음모에 말려들어 한 명은 어이없게 공항에서 총에 맞아 죽고, 또 한 명은 체포되면서 끝난다. 만일 영화가 꿈이라면, 이 영화는 한여름 낮의 악몽처럼 보인다.

미래의 묵시록「데스 워치」

같은 시드니 루메트 감독의「네트워크」(서륭)도 심각하다. 이 영화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무대. 뉴스 방송의 시청률 경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새로 뉴스를 맡은 PD는 이제 인기가 떨어진 앵커를 자를 결심을 한다. 그 프로를 꾸준히 맡아온 앵커는 낙심천만 좌절해서, 그 프로의 마지막 생방송 도중 갑자기 전국 시청자들을 향해 말한다.

"여러분, 제가 내일 생방송 중계로 자살할테니 꼭 지켜봐 주십시오."

방송국에서는 아연실색하지만 시청자들은 '이거 진짜 재미있군'하며 다들 다음날을 기다린다. 시청률은 순식간에 1위를 기록하고, 이 PD는 나중이야 어찌 되었건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문제의 앵커를 내세운다.

영화는 매스컴의 그 치열한 경쟁을 다루는 척하면서, 사실은 현실을 왜곡하고 정보를 독점하며 뒤로는 정부와 거래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마치 해부하듯이 하나씩 절개해나간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이제 용도가 다한 앵커를 '감동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생방송 프로에 PLO의 테러리스트들을 끌어들이고, 그 살해행위에 CIA의 허락을 받는 장면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악질적인 PD에는 페이 더너웨이가 일생일대의 연기를 보여주며(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수상) 결국에는 죽음을 맞는 피터 핀치(남우 주연상 수상)에게는 유작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실화에 근거한 파디 차이에프스키의 각본이다. 그는 원래 NBC 방송의 PD였는데, 자신의 경험을 담은 것이라고 주장해 NBC 방송국과의 소송까지 벌어진 '문제작'이었다.

프랑스 SF 영화인「데스 워치」(삼부)는 멜로드라마로 시작해서 끔찍한 경고로 끝난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현란한 SFX 효과는 없지만, 정말 SF 영화가 보여주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가까운 미래. 온 세상은 모든 것이 비정하고, 수치와 계산만이 전부이다. 그런 기계적인 삶에 염증을 느낀 여자가 어느 날 병원에서 자신이 암에 걸렸으며 이제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처음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한다.

도시를 떠나 펼쳐지는 자연의 황홀한 경관 속에서 그녀는 자유를 만끽한다. 게다가 여행중에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에게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자신에 관한 고백을 한다. 자신의 죽음과 지금의 절실한 느낌을.

그런데 그 남자는 방송국 리포터였으며, 그 남자의 눈은 방송 카메라였다. 그녀의 죽음은 전국에 생방송 중계되고 있었으며, 시청자들도 오랜만에 그럴 듯한 드라마를 만족스럽게 보고 있었다.

주인공을 맡은 로미 슈나이더는 그 절망과 행복을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리포터 역의 하비 케틀은 그가 80년대 컬트영화의 스타라는 소문에 어울리게 '이색적'인 인물을 철저히 소화하고 있다.

「금지구역」이 파헤친 인신매매 세계

어느 날 갑자기 신문에서 인신매매에 관한 기사들이 모두 '증발'해 버렸는데 정말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인지 궁금하다. 그 인신매매에 관한 가장 소름끼치는 영화가「금지구역」(세신)이다.

가구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 제이크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딸이 실종되었음을 알게 된다. 사방으로 알아보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만일 유괴라면 범인들이 돈이라도 요구할텐데 그런 흔적도 없다. 경찰들도 고개를 흔들며 더 기다려보라고 할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 제이크는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딸의 행방을 추적한다. 그리고 사립탐정으로부터 전해 받은 소식은 포기하는 편이 나을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지금 댁의 따님은 납치당해서 포르노영화에 출연중이며, 그 조직은 FBI도 추적중이지만 아직 꼬리를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버지 제이크는 직접 딸을 찾아 나서고, 그때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타락하고 절망적인 세계가 있음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1년 동안 포르노영화 세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폴 슈레이더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했으며,「택시 드라이버」(CIC)에서 뉴욕의 뒷골목을 리얼하게 그린 마이클 채프먼이 여기서도 다시 한번 촬영을 맡아 포르노 극장가의 이면을 뒤져나간다. 왜 우리가 영화에서 꿈을 보도록 현실은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영화가 꿈이라고 비판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늦추지 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