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1993.11.추천리스트

한국영화의 걸작 4편 이야기

임권택 스타일의 집대성「길소뜸」

비디오가게에 들어서서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말.

"아저씨, 여기 한국영화는 어디에 있나요?"

그러면 열이면 아홉은 일단 주인이 위 아래를 훑어본 다음 더 이상의 친절을 포기하고 구석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알록달록한 표지에 온갖 기기묘묘한 제목이 줄을 지어 있고, 도무지 영화배우라고 믿을 수 없는 '근육파' 여배우들이 곡예에 가까운 자세로 서 있다. 한국영화는 거기서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10년 전에 비디오산업이 한국영화를 구원할 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는가? 자본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품화시키는 그 피비린내 나는 과정이 설마 영화만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크게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만일 한국영화가 죽는다면 거기 서 있는 살인자 중에는 비디오도 결코 면죄부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 쓰레기더미 속에서 그래도 몇편의 '좋은' 한국영화가 가까스로(!)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번 달은 한국영화 보는 달로 정해주시길.

지금 관객 1백만 돌파를 목전에 두고 온갖 매스컴으로부터 최대의 찬사를 받은「서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해 보아야 할 단 한 편의 한국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임권택 감독의 최고 걸작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냉정하게 말한다면 부분적으로는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설마라고? 그렇다면「길소뜸」(라이프)을 한번 보아야 할 것이다. 84년에 만든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임권택 스타일의 집대성이다. 분단으로 인해 헤어졌다가 30년 만에 만남의 광장에서 다시 만나는 한 남자(신성일)와 한 여자(김지미)의 삶의 궤적을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고, 거기서 훼손된 시간을 복원하고 그리고 역사에 의해 망가진 자신들의 삶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이 숙명적인 이야기가 여기서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없이 진행된다. 가슴속을 파고드는 그 아픔과, 절망과, 슬픔과, 미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아무도 울지 않는다. 임권택 감독은 정말 지독할만큼 그들을 끈질기게 버텨가며 지켜본다. 울고 싶어지고 목이 미어져도 그의 카메라는 눈물을 떨쳐낸다. 왜냐하면 이건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 곁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해서 울 것인가?

한국영화의 스타라고 알려진 신성일과 김지미는 여기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한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 차 있고, 더 이상 성우를 쓰지 않아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고 갈라진다. 그러나 그 대신 거기에는 그들이 진심으로 이끌어낸 인물들이 화면에서 살아 숨쉰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그들의 연기인생에 있어 하나의 결산인 셈이다.

저주받은 걸작「삼포가는 길」

한국영화에 단 한 편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있었다면 그 영광을 이장호 감독의「바보선언」(금성)에로 돌려야 할 것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영화의 두 명의 조감독이다. 한 사람은 후일「경마장 가는 길」(미디 아트)을 찍은 장선우 감독이고, 또 한 사람은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최고 걸작「상계동 올림픽」을 만든 김동원 감독이다. 이 영화에는 80년대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으며, 꿈과 실험과 비판과 유머와 정신이 있다.

영화는 황당무계하게 시작한다. 이제 영화는 프로야구에 밀려 영화감독은 실직을 하고 투신자살(이장호 감독 자신이 직접!)을 한다. 그리고 넝마주이 동철이와, 택시운전사 육덕이와, 창녀 혜영의 모험이 펼쳐진다. 그 모험은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종횡무진으로 달려가며 닥치는 대로 싸우고, 풍자하고, 쓰러지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김명곤의 악전고투의 명연기와, 이보희의 절정기의 매혹적인 클로즈업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아무런 스토리 라인도 없이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찍어 나간 영화의 스피드 감각이 압권이다. 영화에는 거침없이 현실에 대한 독설이 담기고, 결국 실패로 끝나는 모험활극이 그렇게 가슴아플 수가 없다. 한국영화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저주받은 걸작이 있다면 그건「삼포가는 길」(정우)이다. 이 걸작은 정말 쉽게 만나기 어려운 감동이 담겨 있다. 그러나 개봉하고(75년 국도극장 식목일 프로) 일주일 만에 관객의 무관심 끝에 사라져버렸다. 그 후 비디오로 다시 출시되었으나, 중간에 롤이 바뀌고(그래서 헤어진 사람들이 어느새 다시 만나고 있고),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필름이 보관상의 문제로 멋대로 잘려나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석영씨의 단편소설을 영화로 옮긴 이만희 감독의 이 '유작' 속에는 그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두 떠돌이 남자와, 방금 술집에서 도망쳐 나온 여자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세 사람은 겨울 시골길을 따라 역까지 함께 걸어간다.

이 영화는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거기 담긴 쓸쓸한 겨울풍경은 이제 더 이상 남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저녁이 다가오면 여기저기 굴뚝 위로 밥하는 연기가 잿빛 하늘을 향해 오르고,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하얀 눈이 깔린 논바닥에서 아이들이 쥐불을 놓고 빙빙 돌린다. 그건 사라져가는 시대 속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의 풍경이기도 할 것이다.

이만희 감독은 그 풍경 속을 통과하는 뿌리뽑힌 자들의 여행을 통해서 도시화되어가는 시간의 야만을 본다. 거기엔 삶 위로 드리우는 절망과 외로움만이 가득 찬 것이다.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 확인인가? 세 여행자를 연기한 김진규, 백일섭(「아들과 딸」의 푼수 아버지가 여기서 그의 '진가'를 보여준다), 문숙의 표정은 한국영화가 담아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시비 여하는 직접 확인하시고 난 다음!

악몽의 시나리오, 유신의 '실패작'

만일 원래 의도대로만 찍었다면 아마도 한국영화 사상 가장 중요한 걸작 중의 한 편이 되었을지도 모를 '실패작'이 있다. 조세희씨 원작을 영화로 옮긴 이원세 감독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대우)은 영원히 이 작품을 남겨서 유신정권의 탄압을 보여주고 증언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원래 조세희씨가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에, 당시 금지조치를 당한 김민기씨가 음악을 맡아서 공장지대의 삶을 그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김민기씨의 음악은 일체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고, 이중검열(1차는 시나리오, 2차는 영화)로 각본은 공중분해당했다. 그리고 공장지대는 개작에 개작을 거듭해서 염전지대로 바뀌었고, 등장인물들 중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직업이 바뀌고, 일부는 성공(그런데 무엇에 대한 무슨 성공?)까지 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렇게 해서 완성된 영화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여기저기 잘려 나가고, 대사는 후시녹음 과정에서 다시 뜯어 고쳐졌다.

악몽의 시나리오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만든 이원세 감독은 그 후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결국 영화 찍을 때마다 괴롭힘을 당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 영화를 찍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4년전, 바로 여기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영화는 그 속에서 만들어져 온 것이다. 신세대 영화? 더 이상 탄원은 없고 돌파만 있다고? 그대들은「원초적 본능」과「애마부인」에서 철학을 배운 모양이지만, 그래서 세상을 근사하게 해석할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변혁시켜온 철학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