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1996.11.작품

'희망 없는 윤리에 대한 조소「마리 질랭의 라빠」

지금 소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소녀들과 만나는 소년들은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까? 매스컴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신세대라는 용어의 포위망을 넘나들며 그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베르트랑 따베르니에가 만들어 낸「마리 질랭의 라빠」는 바로 그 소년 소녀들을 60살에 이른 한 노감독이 바라본 영화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배제된다. 소년 소녀들과 노인의 시선과 동작이 서로 교차하면서 어른들의 반응을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지켜보는 이 영화는 1995년 베를린영화제 그랑프리 수장작이다.

소녀 나딸리는 이혼한 어머니가 싫어서 가출한 소녀이다. 그녀는 가끔 어머니를 찾아가며 남자친구인 백수건달 에릭과 그의 멍청한 친구 브뤼노와 함께 살고 있다. 매일같이 집에서 뒹굴며 낮에는 잠을 자거나 헐리우드 액션 영화 비디오를 빌려다 본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중얼거린다. "도대체 프랑스 영화는 너무 따분해!" 알 파치노가 뒷골목의 마약 거래로 흥망성쇠를 누리는 피범벅의 액션영화「스카페이스」는 그들이 매일 빌려 보는 영화이다. 나딸리는 돈도 벌고 놀기도 할 겸 매일 밤 친구와 돈 많은 부자들이 노는 카페를 전전하며 중년남자들을 유혹한다.

그러던 세 사람은 어느날 새로운 생각을 한다. 에릭의 꿈은 '약속의 땅' 미국에 가서 멋진 패션 수퍼마켓을 차리는 것이다. 미국영화를 그 증거로(!) 내세우며 가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친구들을 홀린다. 문제는 돈이다. 에릭은 나딸리의 명함수첩을 꺼내서, 혼자 사는 부자 남자들을 유혹해 그들 집을 털자는 계획을 제시한다. 나딸리가 반대하지만 에릭은 날 사랑한다면 선택하라고 가혹하게 말한다. 부자들은 소녀들의 육체를 원했고, 소년들은 돈이 필요했고, 소녀들은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미끼'(불어 제목의 '라빠'의 의미)가 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그저 돈이 문제였다. 그러나 첫 번째 미끼에 걸려든 변호사가 돈이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다가 그만 고문 끝에 죽어 버린다. 그 비명이 듣기 싫은 소녀 나딸리는 다른 방에서 워크맨의 볼륨을 올리고 대형 화면으로 MTV를 본다. 신문에서는 원한관계라고 추정하고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그날 밤 또다시 미끼에 걸려들 부자를 찾아 나선다. 이제 살인사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1984년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타베르니에와 코르타 베르니에가 각색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사건이 타베르니에의 관심을 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무시무시한 살인사건을 저지르는 주인공들이 여전히 아이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살인사건을 저지르면서 알 파치노의 멋진 액션을 떠올린다. 소녀는 데이빗 보위의 황홀한 뮤직 비디오에 눈이 이끌려 그만 소년들에게 몰래 문을 열어 주어야 할 시간을 놓쳐 강간 당할 뻔한다. 나딸리는 그들 사이에서 때로는 소녀처럼 굴며 "이젠 모두 끝났어, 난 집에 갈거야"라고 하며 어머니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다시 거리로 내몰려 에릭의 집을 찾아가서는 마치 어머니처럼 "더 이상 애들처럼 굴지마"라며 야단치기도 한다. 그녀는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원 속에서 계속 맴을 돈다. 그러나 원점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 원은 점점 그들의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더 커져 나가고, 꿈꾸었던 미래는 그 테두리와 접점을 이루면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이 망가져 간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 자신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경찰에 검거되고 나서 나딸리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형사에게 물어 본다. "제가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풀려날 수 있을까요? 크리스마스에는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데……" 이 말을 하는 표정에서 끝나는「라빠」는 정말로 시종일관 우리에게 제발 그 어리석은 짓들을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게 만든다. 소년 소녀들은 황당무계한 목표를 향해 치달리고 중년남자들은 육체 때문에 눈이 먼 것 같다. 이 영화를 만드는 노인 베르트랑 타베르니에는 이제 자신에게는 이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라빠」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잔인한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 어느 곳에도 희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베르트랑 타베르니에는 이 실화를 영화로 옮기면서 결코 흥미거리로 떨어지지 않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은 매우 윤리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면도날처럼 싸늘한 늙은 재판관의 판결문 낭독만이 있다. 나딸리는 구원받지 못했으며, 중년남자들은 소년들에게 편지봉투 칼과 꽁꽁 묶은 끈, 날카로운 연필심에 난자당하여 시체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는 사건에 대한 분석이 없다. 아니, 어쩌면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미 여기 우리가 도착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거리에서 차를 타고 달리다 소녀를 만난다면, 카페에 앉은 당신에게 말을 거는 소녀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노인들은 당신을 그저 지켜 볼 것이며, 소년들은 문 뒤에서 연필깎기에 연필심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희망이 없는 윤리에 관해서 말할 작정이라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관심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이 얼마나 창백한 결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