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1998.05.작품

풍경과 진실

우리들의 시대에 어울리는 영화의 미학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함의 미학'일 것이다. 이 말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체자레 자바티니였다. 그는 가난함에는 역사의 총체성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가난함이야말로 인간의 도덕과 사회의 모순,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가 만들어 낸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패망한 로마의 거리에 결코 동정과 눈물을 더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가난은 멜로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던 한국영화에 네오리얼리즘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이는 너무 잔인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우리들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외치던 이 땅의 거의 모든 영화가 미학적 파산을 맞이한 것은 감독들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자본주의 단계가 그에 조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진실한 이유다. 우리들의 거리는 빈곤으로 가득 차 있다. 넘쳐 나는 실직자들의 무리,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 버려진 노인들, 여전히 거리에서 마주쳐야만하는 전투경찰들, 아직도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이 모든 것은「자전거 도둑」이나「도이치 영년」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는 풍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당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들은 우리들의 가난함을 보여주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제작비를 끌어들이고 있으며, 정부에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한국영화는 유령들로 가득 찬 호화찬란한 셋트장에서 나와 우리들의 거리로 들어와야 한다. 한숨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는 실제의 거리 말이다.

가난함의 미학을 보여주는 영화를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한국영화에서가 아니라 홍콩영화에서 발견했다. 프루트 챈(陳果) 감독의「메이드 인 홍콩(香港製造)」은 가난함의 미학을 전율할 만큼 절망적(!)으로 창조해 낸다. 현재 홍콩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는 30억원에 이르고 우리의 경우는 평균 11억원이다. 그러나「메이드 인 홍콩」은 단 6천만원(이건 오자가 아니다!)으로 만들었다. 프루트 챈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현장의 제작부장으로 시작했다. 10년 이상 이 세계에서 악전고투하며 온갖 감독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홍콩영화의 대부분은 싸구려 액션물이나 저질 삼급전영(三級電影;포르노 영화)물이다. 그 속에서 영화작업을 진행하면서도 그는 자기의 정신을 놓치지 않았다. 프루트 챈은 몇 년 전에 데뷔작을 만들었는데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기억하기도 싫을 만큼 실패”했다. 그는 다시 기다렸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 이번에는 현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스타 유덕화를 찾아가 그에게서 찍고 남은 자투리 필름을 얻어 왔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자신의 영화에 맞는 아이들을 연기자로 선택했다. 마지막 준비는 최소의 스텝을 이끌고 자기 영화에 맞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모두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다. “이 영화는 NG가 없는 영화다. 왜냐하면 필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쓰다 남은 필름으로 찍은 탓에 한 장면을 장시간 촬영한 롱테이크 화면도 없다. 미리 준비한 거의 모든 장소에서 최단시간내에 작업을 마쳤다.

여기에는 오우삼 영화(「영웅본색」이나「첩혈쌍웅」)에서 보던 호화찬란한 빛과 영웅들의 신화적인 비극이 담긴 느와르의 공간이 없다. 또는 왕가위의 스치는 듯이 요사스러운 속도(「중경삼림」이나「타락천사」)와 그 속으로 스며드는 사유를 담아 낼 여백도 없다. 온통 거친 화면들 뿐이다. 심지어 한 화면 속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필름을 이어 붙인 채 제한된 조명으로 촬영하여 같은 장면에서도 다른 질감을 보이는 화면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연기가 명백히 NG인데도 그냥 방치한 장면들도 있다. 언제나 화면은 조명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노출이 과다한 상태다.

그러나「메이드 인 홍콩」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짜 홍콩을 보여 준다. 홍콩 구석의 거리로 들어가, 거대한 마천루들 사이에서 희망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의 눈으로, 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어른들의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 화면들에서 놀라운 것은 그 가난한 화면들이 자본이나 기술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물들의 마음 속 풍경화를 가감없이, 그야말로 '가난하게' 전하면서 우리를 흡입한다는 점이다. 이 화면들은 멀리 떨어진 우리들조차 단숨에 홍콩의 그 거리에서 살아왔으며 동시에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이들의 일상으로 끌어들인다.

프루트 챈은 자신의 시대와 같은 속도로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메이드 인 홍콩」은 결코 무모한 저예산 영화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프루트 챈은 경제적 토대가 이미 붕괴한 영화산업의 기형적인 제작구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전략으로 저예산을 선택했다. 이는 동시에 그의 미학이며, 더 나아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대정신'을 포착하는 나침반이다. 가난한 시대에는 가난함의 미학이 어울릴 것이다. 한가지 질문을 더! 그러면 돈 많은 시절에는 흥청망청의 미학이 어울릴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시대는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가진 자들은 횡포를 부릴 것이며, 못 가진 자들은 버림받을 것이다. 가난함의 미학은 자본주의 시대 우리 영화의 윤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