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1999.03.시론

독점과 소비의 트랙을 질주해 온 매니아 시대의 종언

지난 겨울 나는 영화관 앞에서 뭔가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뜨아'하게 서 있었다. 코엔 형제의「위대한 레보스키」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갔는데 상영 일주일 만에 이미 간판을 내린 것이다. 서둘러 신문광고를 들고 다른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섯 군데 영화관을 돌아다녔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다음날 잘 알고 지내는 한 영화관 기획실장에게 아직도 상영중인 영화관을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대답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토요일에 개봉하고 실패를 직감했죠. 그런데 정말 참혹한 건 월요일 첫회, 서울 시내에서 이 영화를 상영중인 모든 영화관에 단 한 사람의 관객도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라는 말이었다.

도대체 그게 왜 놀라운 사실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90년대 내내 그토록 논쟁의 중심에 오르던 '영화 매니아 세대의 죽음'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처음 발견한 이들은 비디오 가게의 먼지 자욱한 구석에서 원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장한「블라드 심플」(출시제목은「분노의 저격자」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저격자는 물론 분노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을 찾아내어 통신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영화 「아리조나 유괴사건」이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단숨에 '비디오 컬트' 명단에 올랐다. 네 번째 영화「바톤 핑크」가 92년 깐느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감독상, 그리고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코엔 형제는 공식적인 거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96년 그들은 다시 한번 깐느에서「파고」로 감독상을 받았고, 그 이듬해 아카데미상 7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 스스로 영화광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코엔 형제는 스타였다.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고작 2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코엔 형제의 새로운 영화「위대한 레보스키」는 거리의 죽은 개처럼 버림받았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이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코엔 형제 영화가 권태로운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시시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시시해진 것일까. 영화는 변하지 않았는데 왜 즐겁지 않게 된 것일까.

여기서부터가 논쟁이다. 이미 이 모든 것은 예정된 순서를 밟아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광이란 무엇보다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80년대에 '갑자기' 나타난 영화광들은 매우 특별한 경로를 선택했다. 그들은 비디오라는 '가정용 시네마 데끄'를 어느 날 갑자기 선물 받았고, 그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경로로 온갖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영화를 보는 방법은 셋 중 하나였다. 얌전하게 수입된 영화만 보든지, 끈질기게 주말의 명화극장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정말 어쩔 수 없이) 외국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디오는 모든 게임의 규칙을 버리게 만들었다. 비디오 가게는 동네마다 교회 수와 맞먹게 되었으며, 출시되는 비디오들은 일주일에 평균 12편을 상회했다.

그래서 급기야 비디오 가게에서 '후진 디자인에 엉터리 제목 아래 숨은 걸작 찾기'는 종종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찾기에 비유되곤 했다. 어디 그뿐인가. 비디오들이 국경을 넘어 소포로 날아왔으며, 세포증식이라도 하듯이 복제되어 지하시장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불법복제 비디오는「전함 포템킨」에서 하드 코어 포르노에 이르게 되었다. 당연히도 정보와 지식은 이 경쟁의 와중에서 새로운 힘으로 부상했고, 영화동호회는 경쟁적으로 새로운 영화를 찾아냈다.

남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화 목록은 이 흐름을 주도하는 일종의 위험한 유혹이 되었다. 걸작 목록은 언제나 소수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열렬한 추앙과 경배는 '정식' 개봉과 함께 증발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런 가운데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마치 신학의 대상처럼 여겨졌다. 소수가 독점한 걸작은 우상숭배 대상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공개적인 자리에 불려 나오면 존경과 예찬은 사라지고, 진정한 토론이 시작되어야 할 시간은 영원히 유예된다. 레오 까락스는 그 첫 번째 희생양이었으며 타르코프스키는 상징적인 거품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연말 만날 수 있었던 기타노 다케시의「하나비」의 실패는 예정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영화가 사랑의 담론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의 경쟁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주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내세운 소비라는 트랙 안에 들어가 벌이는 경주가 된 셈이다. 누가 먼저 소비하는지를 따지는 이 경주는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미학적인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러나 소비의 경쟁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트랙 안에 자기의 친구들을 끌고 들어오기도 한다. 왕가위의「해피 투게더」 소동은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들 시대의 영화 매니아 논쟁의 정체는 기이한 자본주의적 소비의 변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올해는 영화 매니아의 영년(零年)이 될 것이다. 그것은 끝이든지, 새로운 시작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예술은 경쟁이 아니라 조화다. 미와 추, 화음과 불협화음, 체험과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조화를 함께 나누기 위하여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공개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속도의 트랙에서 벗어나 천천히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주변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펠릭스 가타리의 말을 빌린 나의 호소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횡설수설하며 일정 방향으로만 달리는 이 거대한 소비의 속도에 맞선 반동분자들이 되어야 한다. 정말이지 트랙 따위는 두들겨 부셔 버리자.

<이 달의 추천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

초현실주의 거장의 작별인사. 평생을 부르주아와 교회의 위선과 싸워 온 루이스 부뉴엘은 기상천외한 잔혹 소극(笑劇)을 만든다. 부르주아 영감은 자기집 하녀에게 한눈에 반하는데, 그 때부터 둘의 계급이 바뀐다. 더군다나 부뉴엘은 전혀 닮지 않은 두 여배우를 2인 1역에 캐스팅하여 '법도 질서도 없이' 출연시킨다. 계급과 욕망, 그리고 혁명에 관한 전대미문의 우화.

「씬 레드 라인」

2차대전시 어느 섬을 무대로 미군과 일본군이 접전을 벌인다. 장교들도, 병사들도 저마다의 기억을 안고 공포와 불안을 마주한다. 인상주의 화면과도 같은 빛 속에서 영화의 이미지들은 더 없이 참혹하다. 20년을 기다려 세 번째 영화를 만든 테렌스 맬릭의 기이한 전쟁영화, 또는 전쟁이라는 파괴에 맞선 이의제기.

<이 달의 추천비디오>

「미드나잇 가든」

한 신문기자가 미국의 남부 도시 사바나의 한 유서 깊은 가문을 취재하러 간다. 그러나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은 살인사건으로 기소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의 이면엔 전혀 다른 세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통 의심스러운 가운데 사건은 점점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노인이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굴곡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아이러니에 관한 슬픈 우화. 2시간 20분의 원판을 자르지 않고 단 한 개의 비디오에 담은 경제적 배려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