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1999.07.작품

제주 민란으로 본 20세기 변방의 조감도「이재수의 난」

우선 세 개의 장면에서부터 시작하자.

첫 번째 장면. 1901년 제주도.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은 청국의 바다에 군함을 포진시킨 채 고종의 칙서「如我待」(이들 대하기를 나와 같이 하라)를 들고 제주도로 와서 포교한다. 온갖 부랑배와 범죄자들이 교인을 자처하며, 조정의 부패한 관리들과 작당해 섬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유생들까지도 능욕한다. 그들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다못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킨다. 그 중 통인 출신의 이재수를 장두로 하는 민당은 제주성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그러나 이재수는 민란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경성에서 참형에 처해지고, 그의 목은 성문 바깥에 내 걸린다.

두 번째 장면. 역사 속에서 거의 잊혀진 이 민란은 1983년 현기영의 소설『변방에 우짖는 새』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이재수의 손에 죽은 7백여 교인들은 순교자가 아니라 외세를 등에 업고 탐관오리들과 작당한 약탈자들이었다. 따라서 '신축교안' 이라고 불리던 제주도 포교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했다. 이 소설은 황석영의 『장길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사이에서 근대사에 관한 문학적 논쟁의 텍스트로 읽혔다.

세 번째 장면. 1999년 아무도 더 이상 민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박광수 감독이 앞의 두 장면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이거나, 아니면 여전히 80년대 방식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내기 위한 선동이거나, 또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역사와 소설을 읽어 내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영화는 이 같은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역사의 격랑에 휘말린 슬픈 인간의 절절한 운명을 보이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제주 민란의 의미를 일깨우려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영화 안에서 소설은 사료적 가치 이외에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감독은 그런 일은 부질없는 짓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이재수에 관한 영화가 아니며, 난(亂)에 관한 영화는 더더구나 아니다.(이 영화의 영어제목은「The Uprising」, 말 그대로「지역적 폭동」인데 불어제목은「Les insurges」, 즉「폭도들」이다. 앞엣 것은 행위를, 뒤엣 것은 사람들은 가리키고 있다. 두 문화권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가 읽히길 기대하는 것 같다.) 박광수는, 이재수와 1901년 제주 민란 사이에서 기묘한 자세를 취하면서 보는 이들을 아주 불편하게 만든다. 즉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와 그것을 이루어 내는 등장 인물과 그것을 보는 관객들 사이에 복수(複數)의 시선이 수없이 끼여들어 관객을 계속 영화로부터 밀쳐 내기 때문이다. 이재수는 등장인물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이재수를 지켜보는 채 군수는 주인공이지만 화자(話者)가 아니다. 채 군수 주변에서 맴도는 까마귀는 화자이지만 말하지 못한다. 그 까마귀는 1901년과 1999년을 넘나들며 우리를 제주 민란의 그 때 그 장소로 이끈다. 그것이 박광수가 만들어 낸 역사와 우리들의 소통방식이다. 그는 이 난을 구한말 제주의 민란이 아니라 서방 제국주의 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지리적 구도를 확장시킨다. 근대의 역사는 냉혈하게 집행되고, 장두 이재수는 자기의 운명을 알지만 이러한 역사의 집행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지금 1백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들이 이재수와 만나는 방식이다.

박광수는 생략과 압축, 비유와 상징으로 이야기 구조를 거의 부서지기 직전 상태로 밀고 나아간 신기한 화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 안에서 역사는 의인화된 개념적 인물이 되고, 관객은 그 인물(역사)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놓고 당혹해 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 인물(역사)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언제나 실패해 온 땅의 이야기이다. (정말 그렇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제주도일 수밖에 없다. 가장 아름답게 그려졌고, 그 위에서 인간들은 부질없이 싸운다.) 같은 말이지만 박광수는 역사 그 자체를 알레고리 삼아서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 중에 언제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지난 1백년간의 모든 싸움에 관한 비감을 담으려고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이재수에서 참혹하게 집행되는 역사의 멜로 드라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문학적으로는 멜로 드라마인 것처럼!) 그 싸움에서 인간들이 마치 꼭두각시처럼 서로 죽고 죽이고 (종종 이 영화의 전투장면들은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구별이 안 되게 군무극처럼 연출되었다.) 모든 사건들은 대부분 롱테이크 화면에 담긴다. 그 안에서 박광수의 관심사는 이재수의 죽음과 민란의 운명이 아니다. 제주도 민란은 천주교의 이름을 빌린 서구적 근대화와 이재수를 내세운 민중이 서로 조화하지 못하는, 비동시적 동시대성의, 광기의 자리다. 그 어디에도 민중의 주체성과 계몽의 정체성은 없다. 오직 혼란과 살육으로 이루어진 힘의 논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박광수는 20세기 끄트머리에서 이 세기의 첫 시작을 끌어들여 결코 매듭을 찾을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이재수의 난」을 그려낸다. 이미 '제주 민란'은 1842년 청나라가 홍콩을 영국에 내주면서 시작되었고, 아직도 이 싸움은 온갖 방식으로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역사를 가늠하는 상공비행의 조감(鳥瞰)을 조선 땅이 아닌 아시아라는 좌표 위에서 새로이 '발명'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를 열고 닫는 까마귀는 우리들의 운명이 한반도를 넘어서서(이 영화의 어디에서도 제주도가 조선의 섬이며, 반도의 끝에 있다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동북아시아의 변방에 자리한 한 작은 섬과 같다고 우짖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박광수가 자신의 주인공을 인물에서 역사로 옮기는 순간 더할 나위 없이 감상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세기에 아시아의 역사가(그 개념적 인물로서) 감상주의자라는 의미일까? 아시아가 감상에 젖는 동안 이재수는 목이 잘린다. 그리고 수없이 다시 죽으면서 피로써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이 얼마나 참혹한 시간의 영겁회귀인가?「이재수의 난」은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없이 슬프다. 이재수의 참형은 비극의 역사일까, 역사의 슬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