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2002.06.본인인터뷰

문화인물탐험 │ 영화평론가

정 성 일

감 독아 닌나 는

실 패 한 영 화 광

이광호『진보정치』편집위원장 │ 사진 박여선 기자 yspark@digitalmal.com

믿기 어렵겠지만 정성일(43)은 ‘실패한 영화광’이다. 영화광은 알겠는데 실패라니? 인터뷰어의 평가가 아니다. 그의 고백이다. 과공비례(過恭非禮). ‘잘 나가는’ 영화평론가가 그냥 한번 겸손 떨어보는 거 아닌가?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그가 평론가로 있는 한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영화광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감독이라는 계단에 그가 아직 올라서지 않은/못한 이유를 알고 싶다. 그래서 첫 질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도대체 왜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평론을 하는 겁니까?”

이건 임권택, 배용균 감독이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그에게 던진 ‘같은’ 질문이다. 그 뒤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예상보다 길게 뜸을 들이던 그의 대답.

“저도 물론 되고 싶었죠, 감독이, 당연히.”

그런데 영화감독이 되고자 한 그의 욕망 ─ 그는 ‘승화’라는 표현을 썼지만 ─ 을 좌절시킨 것은 ‘돈’이었다. 그리고 좌절은 ‘실패’를 낳았다. 감독이 되지 못하는 한 그는 실패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규정했다).

실패한 영화광을 위한 변명 │││ ‘아픈’ 사연을 전하기 전에 우선, 그가 되고자 하는 것은 영화감독이지 공사판 현장감독은 아닐 터. 그가 생각하는 영화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저보고 작가주의를 신봉하는 평론가라고 말합니다. 사실이기도 하고요. 영화의 중심에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보다 그 사람들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창작’ 과정은 영화가 상품화 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의 근거입니다. 마지막 방어선이죠.”

여기서 그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인 사람 불러내기, 인용이 시작됐다.

“브레히트가 할리우드에서 고생고생 하다가 그곳을 떠나면서 영화를 향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술은 영화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영화는 예술을 필요로 한다.’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을 요약 정리하자면, 사람들이 영화의 탄생을 ‘과학적 발명품’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상품으로 탄생됐다. 브레히트의 견해를 차용하자면, 19세기는 발명과 상품의 시대였다. 그런데 1백 년 뒤에 그 시대를 되돌아보니 당시 발명품 가운데 영화만이 예술로 ‘승화’됐다.

“사람들이 전화나 라디오 같은 발명 상품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지요. 그렇다면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발명품을 창조물로 만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예술적인 창조정신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영화의 중요한 측면은 예술성과 그것을 있게 만든 인간들의 창조/승화 정신이다. 물론 그가 산업의 차원에서 영화를 분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열심히 그 작업도 하고 있다. 그때 그가 들이대는 분석틀은 ‘좌파적’인 것인데, 이 부분은 잠시 후 정성일의 사상을 ‘검증’하면서 더 알아보기로 하고 이제 아까 그 사연으로 돌아가 보자.

“요즘과 80년대 초 사이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지금은 자기가 영화를 만들어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 연출부 생활을 거치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이런 가능성은 더 커졌죠. 당시에는 영화감독을 하려면 연출부에 들어가서 막내로 시작해서 첫째까지 3년에서 5년 동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출부에 들어가면 연봉 1백50만 원을 받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좌중을 한판 웃긴다. 사실 그는 이야기를 영화보다 더 재미있게 장시간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전태일도 그 돈 가지고는 못 살아요.”

그는 지금도 부인을 ‘아모레 아줌마’로, ‘소녀 가장’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영화 만드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설명했다.

“영화를 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동의 ─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는 ─ 가 필요했죠. 저는 그런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죠. 집에서 단돈 10원을 가져다 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3대 거짓말 가운데 하나가 “돈 벌어 유학 갈 거다”라는 말인데 그도 그 거짓말 행진에 동참했다. 27세 대한민국 소년 가장으로서 부모님을 모시고 여동생과 남동생의 학비를 조달해야 하는 임무를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공부도 하고 싶었고, 시나리오도 쓰고, 정말 영화(만들기)도 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많지 않더라고요.”

그는 잠시 ‘위장 취업’을 하기도 했다. 여성지와 단행본 출판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학원사에 들어갔다. 유학자금과 가족 생계자금을 벌기 위해서. 그러나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년 8개월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충무로 영화기획사에 있으면서 그는 ‘생활비라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의 알음알음으로 청탁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단 모두 필명(정예린)으로. 영화를 글로 풀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런데 세상사가 좀 이상야릇한 것이 풀렸으면 좋겠다 싶은 것은 자꾸 꼬이고 그만둬야지 생각했던 일은 술술 풀렸다.

“그때 『말』지 기자 한 분이 와서 제게 원고를 써달라고 하더군요.” 그 때가 1991년 10월. 그런데 『말』지 기자 왈, “우리는 수배자가 아닌 이상 본명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필명 사수를 위해 수배를 선택할 수는 없는 법. 40매짜리 원고가 1991년 『말』지 11월호에 실렸다. 영화 관련 매체가 아닌 종합지 성격의 대중매체에 그의 글이 실린 것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아무튼 제 글에 대한 독자들이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듬해 1월부터 『말』지에 고정적으로 글을 싣게 됐죠.”

그래서 올해로 꼭 10년째다. 『말』지 최장기 고정필자가 됐다. 그렇다면 1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 대목에서 우리 일행이었던 『말』지의 박형숙 기자와 정성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딱 한 번 걸렀다는 사실에 ‘양자 합의’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원인 제공이 필자사정이냐, 지면사정이냐를 놓고 ‘기다, 아니다’ 싸움이 벌어진 것. 결론이 안 났다. 누구도 기억력 이외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사실 제가 『말』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영화평을 안 썼을지도 몰라요. 저는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영화에 대한 제 입장을 표명하고 제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말』지에 대한 ‘찐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말』지 앞이라고 그런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필자가 보장한다.

“『말』지에 감사했죠. 제 생각과 『말』지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의 가까움도 좋았고요. 1992년 상황은 지금하고는 또 다르게 영화는 딴따라로 불렸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보는, 대단치 않은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 힘과 문화적 교양이 아마 조만간에 한국사회에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고 그때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말』지를 통해서 제가 이 일을 일정 부분 담당할 수 있었다는 게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진심으로.”

『말』지 고정연재 10년의 의미 │││ 이때쯤 인터뷰어는 ‘껀수’ 하나를 올려야겠다는 ‘욕망’을 드러냈다. 사실 필자는 인터뷰하기 얼마 전, 그러니까 『말』지 인터뷰 명령이 떨어지기 전, 오랜만에 그를 만나 술을 한잔 한 적이 있다. 그때 들은 ‘비밀’ 하나를 이제 『말』지 독자를 위해 공개해야 겠다. “영화 찍을 예정이라면서요?”

실패는 오래 지속되지 말아야 되지 않겠나. 옆에 있던 박형숙 기자가 “정말이에요? 뉴스네” 한다.

“당장 말하기 곤란한 것이 영화를 찍는 게 어디 자기 혼자 의지로 되나요? 누군가 나를 믿고 제작비를 대줘야 하고, 누군가 나를 믿고 촬영을… 출연을… 음…. 그리고 영화는 시나 소설과는 달리 제가 개인적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그런 영화가 나오지는 않아요. 제작과정의 끊임없는 토론과 게이트 키핑 과정을 거치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창조적 공개장’으로 보고 저는 이런 데서 재미를 느껴요. 영화라는 게 감독 한 사람의 천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물론 인류 역사상 몇 안 되는 그런 사람이 나올 수는 있지만, 대부분 위대한 영화는 참여한 사람들이 위대한 목표를 공유한 결과이고….”

뜸을 들인다. 해서 “밝힐 수 있는 최대한의 구체적 계획을 얘기해주시죠.『말』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라고 좀더 몰아붙였다.

“첫눈이 오기 전에 시나리오를 끝낸다는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내년 중에는 제작이 시작된다는 말인가? “그러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소설이나 시와는 달리 완성품으로서 시장에 나오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시장 속에 이미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필름에 담는 과정부터 누군가의 ‘돈’이 필요한데 “그게 넘어야 할 산”이다. 하지만 돈 걱정 안 해도 될지 모른다. 언젠가 그가 모 영화사 사장과 지방에 함께 내려가던 차 안에서 나눈 얘기다.

“정성일씨는 영화 안 찍습니까?”

“제가 영화 만들면 누가 돈을 대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성일씨라면 대한민국 감독들이 모두 성금을 모을 겁니다.”

“아,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했나요?”

영화사 사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감독들이 모은 성금을 건네면서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 ‘정성일, 너도 총살대에 한번 올라가 봐라.’”

어쨌든 확인된 ‘팩트’. 첫눈 오기 전 시나리오 완성. 내년 중 제작 시작 가능성 매우 높음.

정성일, 총살대에 올라간다? │││ 어떤 질문은 그 내용보다 방식이 중요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정성일씨는 맑시스트입니까? ‘그렇다, 아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질문 방식엔 어떤 방식으로 대답할까가 중요하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제가 20대라면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 질문에 대해서 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단서를 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거기에 대해서 의문스런 점도 있고 어떤 점에서는 제 자신이 수정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도 생각하고… 정직하게 다시 한번 그 질문을 제 자신에게 하겠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필자가 이런 따위의 질문을 한 것은 “네 색깔이 뭐냐”는 류의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읽어내는 그의 시각에서 발견되곤 하는 ‘진보적(?)’ 시각의 이론적 연원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제가 영화산업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정치경제적 관점은 항상 명쾌한 답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판이론에 기대어 세상과 영화를 읽어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상부, 하부 구조의 기계론적인 접근이 가져다주는 세상읽기, 영화읽기의 한계 또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했다. 8백50만 관객을 동원한 「친구」와 할리우드판 베트남 영화에 대한 분석을 곁들이면서. 그가 말한 많은 얘기들은 지면 관계로 보나 영화이론지가 아닌 『말』지의 성격으로 보나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적절치 않을 것 같아서 이 정도로 그의 ‘사상’의 한 자락을 들여다 본 걸로 일단락하는 게 좋겠다. 잠깐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주목받은 이슈인 노무현 바람에 대한 얘기를 하고 넘어가자. 이유는 영화판에서 ‘한 생각’ 한다는 인사들은 거의 ‘싹쓸이’ 되다시피 ‘노문모’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뭘까.

“현실적 이유가 가장 컸다고 생각해요. 영화계 내부의 뿌리 깊은 보수/진보 갈등구조가 있었지요. 정치적 관점의 분류라기보다는 우리 영화의 과거와 오늘의 갈등이 이상하게 접목된 갈등이라고 봐요. 김대중 정권 이후 영화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 덕분에 영화 산업이 꽃피운 것은 사실이죠. 영화진흥공사가 폐지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내부의 합리적 의사소통구조, 투명성이 확보된 측면이 있습니다.”

2천억 원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정부 지원이 차기 정권에서도 계속 유지되기를 원하는 영화인들의 바람이 노무현 지지의 주요 원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달았다.

‘아버지’에 대한 거절, 그리고 록의 정신 │││ 지금까지 정성일의 시각을 통한 영화와 사회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이제는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해 정성일이라는 ‘개인’을 한번 들여다보자. ‘꼬마’ 정성일이 극장 영화를 처음 본 건 언제일까.

“제가 기억할 수 없을 때부터 봤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희 아버님 어머님께서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기억나는 영화로는 「아라비안 로렌스」. 커서 그 영화의 한국개봉 연도를 확인해보니까 제가 다섯 살 때더라고요.”

부모님 없이 혼자 영화를 처음 본 건 국민학교 4학년 때 「용문의 결투」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홍콩 무협영화광이었다.

“제가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군대 가던 1980년 5월 11일까지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홍콩영화는 합작영화까지 쳐서 모조리 다 봤어요.”

홍콩영화 마니아가 된 배경에 대한 스스로의 심리학적 분석.

“아마 아버지 문화에 대한 거절이었던 같아요. 그때만 해도 고등학생까지는 영화를 보다 걸리면 정학이었잖아요. 아버님은 저한테 고상한 문화를 주입시키려고 굉장히 노력하셨던 것 같아요. 고전음악을 듣게 한다거나 세계문학전집을 사준다거나 하시면서요. 그럴 때 무협영화를 보고 무협소설을 읽는 게 저를 행복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리고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록음악에 손을 댔다. 그는 아버지가 굉장히 무서운 분이었다고 회상한다. 총각시절 영화평을 쓸 때의 일이다. 집에서 영화를 함께 보던 동생이 영화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 한창 ‘잘난 척’을 하고 있는데,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아버지 왈, “애야, 성일아. 그건 네가 영화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라며 일축해버렸다. 그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아버님의 ‘코멘트’다.

“아버님께서는 제가 영화하는 걸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런 것에 대해 제가 반항을 하긴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영향을 받았겠죠.”

영화 마니아가 영화를 일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뭘까.

“「삐에르 미치광이」. 1975년 고1 때 프랑스 문화원에서 본 이후로 이 영화를 1백 번도 더 봤어요.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때 제가 느낀 건 ‘아, 영화는 위대하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가서 찾은 말이기는 하지만 제가 거기서 시대정신을 읽은 거죠. 영화가 액션이나 감동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구나.”

박통 시절의 빡빡머리 고교시절 그는 어떤 시대정신을 접속했을까. 명동에 가서 음악 잡지 『롤링스톤』을 사서 읽으며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이 더 좋은 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당시 그의 텍스트는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같은 사람들의 노랫말. 그때 고교생 정성일은 “내가 이러다가 간첩되는 거 아냐?”라고 걱정하며 학교 교육의 가르침과 태평양 건너 온 록문화의 가르침 사이에서 겁까지 먹으면서 내면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눈을 돌려 바라본 대한민국의 통기타 가수들은 ─ 아마도 정치적이고 저항적인 록음악의 세례 때문이었겠지만 ─ 모두 ‘사기꾼’으로 보였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부르는 노래 ─ 주로 외국 번역곡 경우 ─ 들이 어떤 노래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한창 ‘건방져진’ 정성일은 “내가 뭔가 이 나라에서 잘못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영화평론가는 영화를 어떻게 볼까 궁금하다.

“처음에는 그냥 편안하게, 두 번째 볼 때의 준비물은 세 가지입니다. 메모장은 목에 걸고, 한 손에는 타이머로 커트수를 재고, 다른 손은 롱테이크인지 편집인지를 알기 위해 시간을 재는 워처를 들고 있죠. 영화는 소설과는 달리 보다가 되돌아갈 수가 없잖아요.”

영화 보기가 힘들어진 정성일이 요즘 하는 영화 이외에 중요한 것은 달리기. 매일 새벽 두 시면 한강변을 달린다. 잠원동 집을 나와 청담대교를 거쳐 왕복 10km를.

그는, 현재 한강변 남쪽의 한 아파트에서 세종대학교에서 영화 강의를 하는 아내 김경욱(38)과 함께 둘이 살고 있다.

※ 김석영(23)의 개인 홈페이지(go.to/dorati)에 ‘정성일 파일’이 있다.
정성일이 ‘영화광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던져질 비판이 차곡차곡 쌓일 곳이다.

이곳은 정성일 영화감독/영화평론가와 관련된 정보를 모은 김석영의 개인 홈페이지입니다. seojae.com/cri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