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2003.02.작품

영웅 노무현이 이 두 편의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 - 해리포터 : 비밀의 방,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통령 선거는 끝났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사람들은 재빨리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은 아무것도 잘 되어가지 않고 있으며, 그저 희망뿐이다. 또는 기대뿐이다. 여전히 대통령 선거는 영웅서사이며, 우리들은 그가 너무 많은 것을 일시에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잠긴다. 그래서 우리들의 문제는 어느새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옮겨가 그의 짐이 되며, 우리들은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해결되지 않은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서 그를 탓하며 불행을 견뎌내려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우리 시대에 대중영화와 같은 역할을 한다. 현실 속의 구원은 멀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크리스마스를 통과하고, 1월 1일이 지난 다음, 설날을 향해 가면서 고작 한 달 만에 두 편의 영화를 남한에서 1천만 명의 관객이 보았다. 이들 영화를 위해 휴일을 제정한 것도 아니며, 게다가 자발적으로 자기 호주머니의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내는 자본주의적 실천을 하면서, 기꺼이 이 두 편의 영화를 위해 1천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이 숫자는 지난 월드컵 때 한국과 독일의 경기를 보기 위해 ‘무료로’ 거리에 뛰쳐나온 사람의 숫자보다 많은 것이다. 인구 4천 7백만의 나라에서 1천만 명이 단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는 말은 다섯 명 중 한 명이 보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거기 있을지도 모르는 대중들의 집단적인 동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 또는 거기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만큼 커다란 소망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글이 그저 영화평이 아니라 영화를 빌린 나의 소망처럼 읽히더라도 5년에 한 번은 용서해 주기 바란다.

1천만 명을 동원한 판타지

조앤 K. 롤링이 쓰고, 크리스 컬럼버스가 연출한「해리포터와 비밀의 방」과 J.R.R 톨킨이 쓰고 피터 잭슨이 연출한「반지의 제왕과 두 개의 탑」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획되어서 같은 시즌에 전 세계에 걸쳐 동시에 개봉되었다. 두 편 모두 소설을 영화화시킨 것이며, 환상문학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양쪽 모두 어마어마한 특수효과와 CG가 동원되었으며, 상영시간은 두 시간을 훨씬 넘어서 거의 세 시간에 이르기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에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비밀의 방」이 조금 짧다.) 다만「해리포터」가 (예고된 바에 의하면 일곱 편의 이야기 중에서)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 두 번째 에피소드라면,「반지의 제왕」은 말 그대로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운데에 해당되어서 그 앞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영화를 보는 내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는 차이가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소감을 말해야 한다면 두 편 모두 환상적으로 지루해서 거의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많은 사람들은 그걸 즐겁게 즐기고 있었다. 그건 온갖 문화 웹사이트에서 문화평론가라는 이름을 단 먹물들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상관없다느니, 나는 투표를 안 하고 놀러 갈 예정이라느니, 대통령이라는 기표는 텅 빈 기표라느니, 이런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과 같은 태도일 것이다. 나는 박정희와 (최규하와) 전두환과 노태우와 김영삼과 김대중을 꼼짝 못한 채 통과하면서 경험을 얻었다. 날아오는 돌을 사유하면서 저건 선험적으로 돌이 아니라 돌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하면 돌이 아닐 수 있다고 믿는 놈들과 년들은 돌을 맞아도 마땅하다. 대통령은 텅 빈 기표가 아니며, 누가 되느냐에 따라 어마어마하게 상관이 있으며, 선거 당일에 놀러 다니다가 일 년 후에 진술서를 쓰면서 무정부주의자로 몰려 맞아 죽어도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하여튼 나는 이 두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추위를 무릅쓰고 영화관에 몰려온 사람들의 소망이 궁금하다. 물론 이 영화들이 전 지구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거대한 맥락을 알 수 없다. 또는 그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왜 지금 이 두 편의 영화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을 홀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반미는 전 세계적인 필연이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왜 지금에서야 촛불시위를 우리들이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과 같은 형식이다. 그건 역사의 전체성 안에서의 세부를 분리해 내고 그 안에서 운동을 정지시켜 그 현상을 이해하려는 나의 노력이다.

하지만 먼저 이 소망은 일종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영화관에 가서 간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열여섯 개나 되는 영화관을 지닌 멀티플렉스에서 무려 열한 개관을 점령한 채 그 두 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미 이 영화를 보러 오기 전에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의 소망은 거기 그렇게 두 편의 영화로 유도되고 있는 중이다. 그들에게는 선택에서 이미 자유가 없다. 그러니까 이번 겨울에 남한에서 영화를 보러 가자, 고 그냥 꺼낸 말은 그 두 편 중의 한 편의 영화를 보러 가자는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말로 환원된다. 그런데 동시에 두 편의 영화를 보러 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서 마치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받은 선택이다. 영화를 보는 자유는 수입업자와 배급업자와 극장주가 쳐 놓은 자본의 욕망 안에 걸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대중적 성공은 항상 그것을 조종하는 자들의 욕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 욕망은 한편으로 대중들이 그것을 보고 싶어 한다는 선험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비밀의 방」과 「두개의 탑」이 선택된 것은 자본을 중재자로 내세운 대중들의 환상이 거기 그렇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중의 거래가 있다. 거기서 그 매듭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약하고 고통받는 영웅의 매력

나에게 이 영화들의 스펙터클은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스펙터클을 걷어내고, 그러고 난 다음 이 두 편의 영웅서사에서 내게 가장 이상하게 보인 것은 해리포터와 프로도의 인간적인 약점이었다. 그 둘은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 아닌데, 그 두 명의 영웅은 결함으로 가득 차 있다. 해리포터는 아직 마법을 배우고 있는 학생이며, 그를 돕는 친구들은 지혜롭지만 약하고(헤르미온느) 의롭지만 어리석다(론과 해그리드). 또는 난쟁이 호빗족의 프로도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지 반지의 유혹을 견뎌낼 뿐이다. 그를 돕는 8명의 원정대원들도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 주변에는 온갖 악당들이 설치고,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적이 거기 그렇게 버티고 있다. 모험은 그들의 몫이며, 즐기는 건 우리들의 차지이다. 이 두 명의 영웅은 미숙하고, (해리포터는) 아버지의 무게에 휘청거리면서 나는 누구냐고 자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숙하고, (프로도는) 반지의 유혹과 싸우면서 목표를 향해 아주 힘겹게 한 걸음씩 전진한다. 거기서 우리 시대의 대중들은 영웅을 본다.

대중들의 대통령의 선택은 이상하게도 거기서 다시 한 번 재현된다. 한 번은 현실 속에서 고통스럽게 이루어지고, 두 번째는 스크린 위에서 즐겁게 반복된다.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기를 희망하는 환상은 그 시나리오의 이야기가 지니는 성공이나 만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영웅에게서 그 희망의 드라마가 지니는 약점을 끌어내 거기서 희망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역설의 힘이 있다. 대통령에게서 모순에 찬 세상과 ‘좋은’ 희망의 매개가 이루어지길 힘을 다해 소망한다. 또는 영웅이 희망을 이루는 대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매개하는 그 안간힘의 과정을 통해서 감동한다. 하지만 경제학자 갈브레이드는 냉혹하게 말한다. 새해에 방송국에서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덕담, 여러분이 원하시는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시길 바랍니다, 라는 말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의 모순은 첨예한 대립으로 현실 안에서 결국 존재할 것이다.

영화 말고 대중의 소망을 보라

그래서 여기에 두 편의 영화가 주는 기기묘묘한 교훈과 마주치게 된다. 해리포터 이야기가 끝내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머리에 난 그 상처의 사연이다. 해리포터가 아무리 알고 싶어 해도 그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처가 아버지와 ‘최고’ 악당 볼드모트와의 싸움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그 상처를 이겨내야만 한다. 아버지는 졌고, 아들은 그 싸움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해리포터의 이야기는 그가 이 최후의 싸움에서 결국 이길 수 있도록 준비하는 성장 이야기이다. 그 싸움은 매번 해리포터에게 진심을 요구한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돕는다. 오직 그것만이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교훈이 「반지의 제왕」에 담겨 있다.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버리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지배하는 반지를 얻기 위해서 지난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그 어려운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버리는 것은 얻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이 두 편의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저 유치하기 짝이 없는 황당무계한 줄거리는 일찌감치 버리시고, 눈을 홀리는 스펙터클과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사운드의 광란에서 용케 빠져 나와, 남한 인구 1천만 명이 보러 이번 겨울에 달려나온 이 두 편의 영화에서, 당신을 찍기 위해 선거장까지 기어이 찾아가서 당신의 이름 아래 도장을 찍은 다음, 가슴 조리며 투표결과를 기다렸던, 그 사람들의 마음 속의 영웅서사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여 주셨으면 정말 고맙겠다. 정말, 정말 당신은 우리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