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1996.09.19.작품

구름 저편에 - 이제는 돌아와 죽음 앞에 선 내 누님 품속 같은 사랑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이미 프로이트는 말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 아토니오니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는 것 같다.「구름 저편에」는 안토니오니가 반신불수의 몸을 이끌고 그의 나이 83세에 그려낸 17번째 영화이다. 이제 조금씩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더니즘의 대가가 그의 최신작(아마 유작이 될 것 같은)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더하지 않은「순수한」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순수함은 지나쳐서 삶조차 증발시켜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하고 창백한 일상생활 속에서 죽음처럼 진행된다. 이것은 이제 죽음 앞에 다가선 노인이 언뜻 삶을 돌아보며 마치 경멸하듯 우리들의 욕망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탄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둘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호한 망설임이 우리를 침묵속에서 고통스럽게 만든다.

영화는「구름 사이에서 날고 있는」비행기에 탄 미국 영화감독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유럽여행을 따라 서로 아무 관계없는 네가지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첫번째 이야기. 한 소년과 한 소녀가 우연히 만난다. 두사람은 한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년은 그녀와의 자자리를 거절한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지고 다시 일년 뒤에 만난다. 그리워했던 그들이지만 두사람은 결국 다시 헤어진다.

두번째 이야기. 주인공 영화감독은 고향 해변가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두사람은 함께 자지만 그는 왜 그녀가 아버지를 죽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세번째 이야기. 12년간 함께 산 부부 사이에 한 소녀가 끼여든다. 남편은 그녀와 바람을 피우고 아내는 불현듯 결혼생활에 회의 느끼고 그의 곁을 떠나간다.

네번째 이야기. 한 소년은 한 소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하루종일 따라다니며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소녀는 대답한다. 자신은 내일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소년은 자신의 사랑이 신의 사랑에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우선「구름 저편에」에 관한 두세가지 의심과 추측. 이 영화는 빔 벤더스의 안토니오니에 대한 존경과 우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안토니오니가 반신불수 상태에서 만들면서 빔 벤더스는 스스로 조감독을 자청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영화 속에 벤더스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부분적인 삽화들은 벤더스가 연출한 장면들이며 주인공이 영화 감독이라는 설정은 전적으로 벤더스 스타일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구름 저편에」는 안토니오니의 영화이다. 그는 여기서 여전히 모더니즘의 세계에 머물며 우리 시대를 두리번거린다. 이제 남은 것은 주인공들과 그들의 마음 속의 고통을 반영하는 빛과 색채들뿐이다.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침묵하고 저항하는 안토니오니의 개인적 이미지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다시 우리 자신의 자아에 물어보아야 한다. 도대체 이 무거운 고통의 무게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를 존재에 대한 백치로 만드는 이 질문은 여기서 안토니오니에 의해 사랑의 형태로 다시 던져진다. 팰러디와 아이러니는 여기 감히 끼여들 틈조차 없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다음이다. 그래서 죽음 다음에 던져진 사랑이라는 사유는 도대체 어떻게 불러야 한단 말인가?「구름 저편에」가 모더니즘 시대의 유언처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시체의 멜로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