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XTplus』 2007.03.09.(23호)작품

C O L U M N  이 장면 심금을 울리는구나!

접속의 영화, <열대병>과 <징후와 세기>


이번 서울시네마테크가 진행한 ‘영화의 친구들’에서 위임받은 백지수표에 문득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써야겠다는 매우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는 남들도 보고 싶을 거야, 라는 식으로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나는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징후와 세기>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게 준 백지수표에 그 영화의 제목을 썼다. 아핏차퐁의 영화가 내게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아, 이제는 영화가 그래도 되는구나, 라는 새로운 서사를 찾아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핏차퐁은 인스톨레이션을 영화에 끌어들인 첫 번째 시네아스트일 텐데, 단지 그것을 공간적으로 설치하는 대신 시간과 기억 안에서 이미지의 설치 방식을 놓고 수집하고 배치하는 과정을 진행시키다가 갑자기 중단하고 공간을 옮겨서 다시 시작해서 그것을 재수집하고 재배치한다. 여기서 방점은 중단이다. 이때 영화라는 필연적인 선형성의 시간에서 그 중단은 일종의 블랙홀을 만들어낸다. 아핏차퐁은 여기서 사태를 다소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중단의 매개 항을 설정한 다음 거기서 타이라는 지리적-정치적-민족지학적 전제, 정글이라는 자연, 계급, 성차(아핏차퐁은 게이이다), 불교적 담론들, 그리고 그 자신이 미국에서 작업했던 게임의 내러티브를 끌어들여 인상-기호, 감정-기호, 동물-기호, 청각-기호, 나무-기호, 감각-기호, 하여튼 기호의 다발로 만들어놓는다. 그러니까 앞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존재들이 뒤에서 되찾은 시간의 기호들이 되어 돌아온다. 이때 오브제들, 제스처들, 사건들, 인물들, 대사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에 관한 기억들은 둘 사이를 연결하는 필사적인 끈이다. 만일 이 끈을 놓치면 아핏차퐁의 영화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그저 의미없는 오브제들의 공간, 무의미한 기호들의 장소로 바뀌어버린다. 그는 그걸 <열대병>에서 하여튼 해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열대병>을 본 다음 이건 굉장한 만큼 다시 이걸 넘어서서 더 나아가는 다음 영화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 영화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말하자면 <징후와 세기>는 일종의 내기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왔다. 유감스럽지만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가을에 부산영화제에 왔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글들을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무슨 영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좋다는 건데 이게 왜 좋다는 건지는 거의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런 다음 나는 이 영화를 서울시네마테크에서 마침내 보았다. <징후와 세기>는 많은 설명 끝에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영화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극장전>과 같은 영화. 그런 영화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이 영화를 읽어내기에 적절치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반드시 말해야겠다. <징후와 세기>는 영화 사상 우리가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번외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왜 <열대병>과 완전히 똑같은 대사들과 거의 동일한 구도들이 드문드문 유령이 출몰하듯이 나오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 자막이 나오는 첫 장면은 <열대병>에서 나온 장소에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방 안에서 찍었고, 다른 하나는 집 바깥에서 찍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냥 나는 거의 망연자실해졌다. <징후와 세기>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어느 무더운 날 오후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단 체조를 하는 이 ‘뜬금없는’장면은 <열대병>의 정확하게 중간을 자르는 장면이다. <열대병>의 앞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영화는 갑자기 정글에서 전혀 다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완전히 다른 톤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래서 앞의 이야기와 뒷이야기 사이의 배치가 문제가 된다. 그런데 <징후와 세기>가 여기서 ‘다시’끝날 때 이 영화는 <열대병>의 전반부로 읽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 다음 <징후와 세기>는 이 마지막 장면 ‘이후’의 영화를 <열대병>의 후반부에로 연결해도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접속의 영화다. 혹은 <열대병>의 전반부를 지우고 그 앞에 <징후와 세기> 전체를 놓은 다음 <열대병>의 후반부를 연결해 하나의 영화로 보아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정말 이래도 상관없는 것일까?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응, 그래도 이제는 상관없어, 라고 대답한다. 내리치는 듯한 결단. 갑자기 영화에서 하나의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왜 내게 아무도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것일까? 그것이 스포일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