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ud』 2006.06.작품

정성일의 영화 다시 쓰기

나는 류승완의 영화를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왜 이 사람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걸 놓아두고 엉뚱한 데서 재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나는 류승완의 가장 좋은 영화는 그의 단편영화 세 편과 중편 영화 하나는 묶어놓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에 만든 자화자찬에 가까운 <다짜마와 Lee>는 귀엽지만 그만큼 역겹다. 하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가 충무로에 입성해서 만든 <피도 눈물도 없이>부터가 문제이다. 성룡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류승완은 성룡 영화의 장점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지만 단점은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는 시나리오를 잘 쓰지 못한다. 혹은 시나리오로 이야기를 만드는데 매우 서툴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관객들과 머리싸움을 하려 들 때 그걸 보는 사람들은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의 <아모레스 페로스>를 버무린 이 영화는 그러나 그 중 어느 영화에서 비견할만한 장면을 단 한 순간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다음 류승완은 특수효과에 이끌렸다. 아마도 자신의 부족한 연출을 컴퓨터에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만들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우선 류승완은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액션장면의 특수효과에 대해서 그 어떤 견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스는 너무 조잡해서 심각한 순간에조차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든다. 한국영화의 비극은 같은 입장료를 내고 같은 영화관에 자리 잡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문제는 이 영화는 흥미진진한 소재를 잡은 다음 가장 진부하게 풀어나가면서 믿을 수 없게 따분한 줄거리로 시종일관한다. 왜 그런 지를 생각해보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로맨스를 근본적으로 찍을 줄 모르는 감독이다. 혹은 그런 게 낯간지러워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 다음 빨리 액션장면에 몰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는 그때 자기 영화의 감정선을 놓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아마도 주변에서 이야기를 잘 풀어내지 못한다는 그 누군가의 지적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다음 영화 <주먹이 운다>는 두 인물의 성격과 삶에 맞추어 놓고 온통 이야기에 모든 것을 할애한다. 그 결과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아무도 류승완의 영화를 보러 갈 때 그에게서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민식씨는 쎈(!) 배우이다. 그는 이 영화에 들어서자마자 거의 휘저어놓듯이 자기 마음대로 영화를 끌고 간다. <주먹이 운다>는 최민식 자신에게는 <파이란> 이후 가장 깊이 있는 인물을 만들어낸 영화이다. 이 말은 최민식에게는 즐거운 소식이지만 류승완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류승완은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고, 그러다가 동생 류승범의 이야기를 찍을 때는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들어서 거의 신파에 가까워진다. 아마도 (내가 그의 삶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제 자신의 자서전적 요소가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류승완은 이제 자신이 보여줄 것을 거의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직접 출연해서 액션 연기를 선보이는 <짝패>를 만들었다. 정말 맹렬하게 찍었다. 대역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카메라를 얼굴 가까이 찍었고,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편집 없는 액션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뿔싸! 이 영화에 함께 출연한 정두홍을 그는 잊었다. 정두홍은 이 짧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거의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그 자신을 위한 오마주를 바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류승완의 영화라기보다는 정두홍의 (액션 스쿨의) 액션 매뉴얼처럼 보일 정도이다. 물론 류승완 자신은 셀지오 레오네 풍의 음악을 ‘깔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자기 식으로 만들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친구>의 충청도 버전이다. 게다가 마지막 심혈을 기울인 ‘객잔’ 액션 씬은 아무리 변명을 해도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 이시이 오렌과의 청엽정 칼부림이 떠오른다. 물론 이런 세트는 홍콩 쇼 브라더즈 영화의 발명품이며, 자신은 장철의 영화로부터 가져왔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이런 장면은 결국 콜럼부스의 달걀이다. 먼저 하면 임자다. 게다가 이 장면 자체를 잘 찍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류승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보여준 가능성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액션 장면을 그렇게 잘 찍지는 못한다. 액션 콘티는 전체와 디테일 사이를 잘 구별하지 못할 만큼 둔한 편이며, 무엇보다도 액션 장면들이 감정선을 타고 어떤 율동, 혹은 리듬을 타고 흐르지 못한다. 그냥 치고 받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액션장면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를 보면 이상하게도 나는 맞아본 사람만이 느끼는 어떤 아픔 같은 것이 전율처럼 슬프게 전해진다. 류승완은 액션을 영화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배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는 박찬욱이 아니다. 박찬욱은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의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박찬욱은 주인공이 맞을 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진다. 그렇게 맞아본다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영화적인 상상만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승완은 때릴 때보다 맞을 때 진지해지는 감독이다. 나는 그가 그 감정을 안고만 있지 말고 맞을 때 진지해지는 감독이다. 나는 그가 그 감정을 안고만 있지 말고 영화 안에서 주인공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때 그는 비로소 보는 사람들이 액션의 쾌감이 아니라 그 슬픔을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은 당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