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ud』 2006.12.작품

정성일의 영화 다시 쓰기

 

디파티드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로 번역될 때 종종 맹렬하게 그 번역을 거절할 때가 있다. 이건 책을 번역해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혹은 노래 가사를 번역해본 사람들은 불가능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유위강의 <무간도>는 21세기 들어서서 내가 본 가장 흥미로운 홍콩영화 중의 하나이다. (한편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은 다들 알다시피 이 영화가 삼부작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영화는 두기봉의 <흑사회> 이부작과 함께 홍콩이 여전히 아시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영화 도시 중의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신의 반문. 왜 왕가위가 아니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왕가위는 사실상 21세기 들어서서 홍콩에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고 있다. 무대가 홍콩이긴 하지만 <화양연화>와 <2046>은 필리핀과 싱가폴에서 찍었고, 지금 촬영 중인 <나의 블루베리 나이트>는 미국에서 찍었다. 그런 다음 2008년에는 <상해에서 온 여인>을 상해에서 찍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홍콩감독으로 중국반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자 그는 내게 질문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잠깐만, 만일 당신이 나를 도시로 정의하길 바란다면 상해감독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상해에서 태어났고, 결국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부터 나는 왕가위를 (그가 바라는 대로) 더 이상 홍콩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틴 스콜세지가 <무간도>를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간도>는 홍콩을 벗어날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중경삼림>이 뉴욕이나 파리, 동경, 서울로 옮겨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홍콩의 침사추이, 혹은 청킹이 절대적인 배경으로 거기 있어야만 이야기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거의 맞닿을 것만 같은 거리, 너무나도 촘촘히 붙어있는 건물들, 비좁은 골목, 영국을 흉내 낸 지상 일층의 거리, 그러나 슬럼가에 가까운 이층 위의 건물들. 거의 개미지옥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밀집. 홍콩을 관광할 때 가장 바보 같은 선택은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건물에서 그냥 홍콩을 내려다볼 때 옆에 있었던 왕가위가 내게 일러주었다. “홍콩의 특징이 무언지 알아요? 이웃이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도 마틴 스콜세지는 <무간도>를 뉴욕으로 옮긴 다음 <디파티드>를 만들었다. 불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스콜세지라는 이름에 기적을 기대했다. 그는 최상의 스태프들과 만들었다. 촬영도 오랜만에 그의 오랜 동료인 마이클 발하우스가 돌아왔다. 그러나 마법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는 끔찍했다. 아마도 <디파티드>는 그의 가장 나쁜 영화로 남을 것 같다. 심지어 <비상근무>보다 더 나쁘다. 이야기는 새로운 것도 없이 그냥 반복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편을 하나로 합치면서 더 나빠졌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달리 소개할 필요도 없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양조위가 보여준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유리처럼 신경질적인 불안감을 담기에는 너무나 단조롭고, 맷 데이먼은 유덕화가 보여준 기절 직전의 긴장 속에서도 포커페이스로 버티면서 점점 히스테리에 빠져드는 내면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둔하다. 증지위의 역을 대신 한 잭 니콜슨이 가끔 유머를 드러내지만 그러나 상징적 의미에서 ‘나쁜’ 아버지에 이르지는 못한 채 상투적인 뒷골목 보스에 머문다. 마틴 쉰은 더 나쁘다. 그는 ‘착한’ 아들을 악당들의 소굴에 보낸 ‘나약한’ 아버지 황추생을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마틴 스콜세지는 <무간도>를 근본적으로 오해했다. 이 영화는 그저 단순한 홍콩 느와르가 아니다. 그래서 양쪽에 서로 ‘언더커버’(첩자)를 심어놓고 벌이는 두뇌게임이 아니다. 물론 <무간도>가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바탕에는 불교가 말하는 중생의 깨달음이란 모두 미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주의가 가득 차 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 반환이후 혼돈에 빠진 정체성의 위기라는 문제가 겹쳐져 있다. 중국 반환 ‘이후’ 홍콩의 질문은 단 하나로 회귀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여기는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여기는 홍콩인가, 중국인가? 문제는 어제와 오늘이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갑자기 정체성이 문제가 될 때 대답은 (상상적) 내가 (상징적) 내가 아닐 때 (현실적)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때 이 질문이 실재의 나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라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

그런데 마틴 스콜세지는 불교를 과소평가했거나, 아니면 <무간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마틴 스콜세지는 불교를 일종의 뉴 에이지 비슷한 명상과 심리적 메시아주의의 리믹스 정도로 생각한다. 이미 그것을 우리는 그가 달라이 라마를 다룬 <쿤둔>에서 보았다. 그런 다음 마틴 스콜세지는 <무간도>를 그 자신의 오랜 주제인 기독교의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문제로 끌어당겼다. 단지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걸 다시 미국 내 인종문제와 계급문제로 뒤범벅을 만들었다. 콜린(맷 데이먼)은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감에 프랭크(잭 니콜슨)를 찾아가 부하가 된 다음 경찰에 위장 잠입하고, 빌리(디카프리오)는 자신의 계급적 출생 때문에 끝내 제도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기꺼이 악당들의 소굴에 들어가 첩자를 하면 승진시켜주겠다는 퀸난(마틴 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유위강의 <무간도>에서 부처가 준비한 지옥 중에서 가장 나쁜 지옥은 (제목 그대로 9개의 지옥 중에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無間道’) 1997년 ‘이후’의 홍콩이다. 여기서는 어디까지 선이고 어디서부터가 악인지 알 수가 없다.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고 모두가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이 모든 거짓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영화를 보는 당신도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악당들 틈에 숨어있는 경찰 진영인(양조위)이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를 고백함으로써 거짓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윤리적 갈등에 빠지는 동안 경찰 속에 숨어있는 유건명(유덕화)은 점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경찰이라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윤리와 도덕 사이의 이상한 대립이 있다. 그러나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는 그들의 정체성을 단 한 순간도 잃지 않는다. 두 영화 사이를 가름하는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콜린이 프랭크를 죽일 때이다. 콜린은 보스 프랭크가 FBI와 내통하고 자기들의 정보를 팔아먹는다는 사실에 자신의 위장 잠입도 언젠가는 그로 인해 발각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를 죽여서 입을 막는다. 콜린은 그냥 악당이다. 그러나 유건명은 보스 한침을 경찰로서 죽인다. 그때 이미 그의 정신병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디파티드>는 퀸난의 심복인 덕냄이 복수로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듯한 얼굴로 득의양양하게 집에 돌아온 콜린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고, <무간도>는 유건명이 완전히 미친 상태에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 둘의 차이는 사실 정반대이다. 이때 이 두 편의 영화적 차이를 취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둘의 관계가 원본과 리메이크의 사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을 피해도 <디파티드>는 결국 <무간도>의 해석 버전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질문하는 것은 해석이 올바르게 되었는가, 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석을 피했는가, 가 내 질문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를 실망시킨 것은 스콜세지의 오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오해가 창의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오히려 그는 <무간도>에 말려 들어간 다음 그 안에서 자꾸만 모든 것을 단순화 시키고, 그런 다음 이제까지 자신이 해온 것을 도식적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웃겨지기 시작하고, 인물들은 점점 더 단순해진다. 그래서 악마도 21세기 장르영화 중에서 가장 복잡한 상황에 던져져서 가장 복잡한 성격을 가졌던 두 명의 주인공이 매우 도식적인 상황에 던져져서 더할 나위 명쾌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나는 물론 이걸 할리우드 영화의 우매함이라거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인한 단순화라는 식으로 바보 같은 결론을 끌어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더 바보 같아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 질문은 왜 한 문화로부터 다른 문화가 건너올 때 그 안에 담긴 복잡성을 희생할 수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오늘날을 사람들은 흔히 세계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말의 함정은 세계화되었다고 해서 내가 살고 있는 국가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내게 주어진 장벽과 한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화는 상품의 교환이 점점 더 쉬워진다는 뜻이지 그 안에 담긴 문화가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지닌다는 뜻이 아니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 당신은 소니 노트북을 들고 아르마니 청바지를 입은 다음 폴 스미스를 걸치고 스타벅스에서 열심히 인터넷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갑자기 일본어와 영어와 이탈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폴 오스터와 이탈리 칼비노를 그들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은 몇 개 국어의 야후를 사용하는가? 당신이 톰 요크의 신보를 샀다고 해서 딴 일을 하면서 들어도 영어 가사가 귀에 착착 들어온다는 뜻은 아니다. <디파티드>는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를 선택한 다음 최상의 감독과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참여해서 만든 영화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택한 텍스트를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게 만든 다음 질문을 삭제시켰다. 그런데 그건 이해가 아니라 포기이다. 그때 이 포기는 원본에 폭력을 가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혹은 <디파티드>는 <무간도>가 영미권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세계화시대의 다문화주의라는 말이 지닌 허구의 가장 좋은 예 중의 하나를 보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책을 집어 드는 당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이 사랑하는 영미 락-팝-얼트-프로그레시브-메틀-일렉트로니카 음악들은 문화를 건너오면서 당신의 귀에서 다문화주의를 포기하고 어떤 단순화의 과정을 거쳐 정작 핵심은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