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임의 FM영화음악』 1994.10.05.본인인터뷰

정성일 마지막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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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 (22:23~)

대전 대덕구 평촌동에 박종성씨 잘 들으셨습니까? 영화 "모 머니" 중에서 컬러 미 배드가 부른 "Forever love" 띄워 드렸습니다. 경기도 강화 옥림리에서 안인희씨가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하신 분. 자, 바로 그 분, 바로 제 옆에 나와계십니다. 영화 읽기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시는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은임

안녕하세요.

정은임

네. 또 어느 분이 명성여중 3학년에 김규희양이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정성일씨가 예전에 모 영화 잡지에 편집 차장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정은임

네, 사실입니다.

정은임

사실입니까?

정은임

예.

정은임

(웃음) 만일 그렇다면 정말 그때 뭐 "이자벨 아자니" 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고 하는데 "이자벨 아자니" 를 만난 느낌이 어땠는지를 좀 물어봐달라고 했는데요.

정은임

어... 제가 "이자벨 아자니"를 만났었던 것은 89년도 9월 "동경영화제"에서 였었는데요. 사실 그것은 개인적인 인터뷰는 아니었었고, 공식 기자 회견 석상이었었는데 사실은 기자회견이라는 곳을 저는 열심히 쫓아다녀 봤지만 수많은 감독들 "구로자와 아끼라"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사실은 인터뷰 석상에 검은 썬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인터뷰는 처음이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자벨 아자니 라면 마땅히 그럴만 해"라는 표정을 짓고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었는데 그 인터뷰 석상에 온 "이자벨 아자니"는 질문에 대해서 그 지나긴 질문에 대해서조차 아주 짧은 대답 외에는 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이자벨 아자니"의 미모보다도 "이자벨 아자니"의 그 표정보다도 사람들을 더욱 매혹시킨 것은 그 아주, 뭐라고 표현하기 곤란할 정도로 매혹적인 그 목소리였었습니다.

정은임

아, 목소리도 좋은가보죠. 네.

정은임

그래서 영화와는 또 달리 제 생각에는 혹시 가성을 쓰는 것이 아닐까라고 느낄만큼 낮은 허스키 목소리의 그 쇠 긁는 목소리처럼, 그래서 마치 여자가 "탐 웨이츠" 목소릴 흉내낸다면 저런 목소리가 아닐까라는 식의 발음으로 사람들에게 대답을 하는데 그녀는 30분만을 인터뷰하고 나서는 갑자기 일어나면서 "이제 나머지 얘기는 영화로 대답하겠습니다."라고 돌아서서 작별 인사도 하지않고 돌아나가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에서 온 기자에게 원래 "이자벨 아자니가 저런 식으로 인터뷰 합니까"라니까 대답인 즉은 "이자벨 아자니"는 그 "오바(Au revoir)" 라는 "안녕히 계세요, 다시봅시다."라는 인사를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라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아, 자기의 매력을, 신비를 유지시키는 방법도 참 여러가지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은임

네, 자, 잠시 딴 사람 얘기를 했는데요. 오늘 정성일씨 말씀듣죠. 어떤 얘긴가요?

정은임

오늘은 좀 엉뚱한 얘기를 제가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고백에 빠질 때는 종종 자꾸 스노비즘처럼 느껴져서 저는 굉장히 역겨워서 싫어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은 왠지 여러분들에게 제 고백을 들려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사실 오늘은 제가 그 이 프로에 나온지 꼭 2년째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년간 사실은 여러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남의 책을 열심히 읽고, 남의 영화에 관해서 열심히 이야기 했을지언정 제 이야기를 솔직히 여러분들에게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제 고백의 시간이고 취조당하는 시간이며 또한 혹시나 저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저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제 애정고백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가 그동안 본 영화들 중에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매순간 저는 그 베스트10 뽑는 것이 제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일기장을 보고 있으면 이제 어렸을 때부터 베스트10 기록이 매년 기록되있는 걸 보고 혼자 웃고 킬킬대고 웃고 때로는, 사실은 중학교때 만들어 놓은 제 작성표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꼭 봐야될 영화 500편' 하고 매년 지나갈 때 마다 지웠는데 아직도 다 못 지웠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얼마만큼을 더 봐야될진 전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영화를 저희 부모님 손을 떨구고 제가 입장료를 들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한 것은, "프랑소와 트뤼포"는 바로 그때부터 영화광의, 영화 폐인의 길을 걷게 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 국민학교 2학년때였었습니다. 국민학교 2학년때 저를 매혹시켰던 영화는, 사실은 그때 이 영화의 감독이 누군지도 몰랐었던 그 "용문의 결투" 라는 영화였었습니다.

정은임

중국영환가보죠?

정은임

예. 그리고 후일 이 영화가 그 "호금전"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 "용문객잔" 이라는 영화와 국민학교 2학년 때 제 베스트1 영화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였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저희 부모님과 같이가서 거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얘가 자지않을까 걱정스러워하던 우리 부모님은 주무시고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 매달려서 이렇게 영화가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라고 보았으며 또 한편으로는 "용문객잔" 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사람이 하늘을 날고 또 칼을 휘두르며 벌어지는 그 활동사진적인 매력이 사실은 헐리우드 영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었습니다. 저는 이 "용문객잔"을 일주일 내내 한 회도 빼 놓지 않고 본 것이 제 첫번째 영화에 바친 그 애정고백의 순간이었는데요. 저는 이 "용문객잔"을 본 이후로 무협영화와 그 무협소설에 아주 거의 빠져 살다시피했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 이 나이 때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었을 것 같은데요. 이때 본 무협영화 중에서 제가 뽑는 걸작들이라면 역시 그 "외팔이", 제목은 다소 촌스럽죠? "용호의 결투", "복수", "금연자" 이 영화들은 정말 제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다시 봐도 걸작일 거야 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어쩌면 보기 두려워할지도 모르는 영화들일 것입니다. 또 그 때는 그 무협소설하면 다 "와룡생"이었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와룡생" 소설로 돼 있어서 도대체 이 사람은 만화가게 가보면 책을 천권 이상 발표한 대단한 소설가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와룡생" 소설 본 것들로서는 제가 "군엽지","무휴지","금검지","무림천하","쌍봉기" 같은 영화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요. 사실은 저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 학교가는 길에 만화가게에 들러서 무협지 다 바꿔서 가방에 잔뜩 싸 가지고 가서 수업시간 내내보구 끝나면 달려가서 영화보고 또 돌아가서 그 다음날 돌려줄 무협지를 열심히 보고 그러다가 성이 안 차서 국민학교 5학년땐 노트를 사서 무협소설을 열심히 쓰다가 저희 부모님한테 걸려서 굉장히 야단맞고 (정은임: 웃음) 두 번 다시 만화 가게에 드나들지 못하게 단단히 야단맞은 적이 있었는데요.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사실은 이제 점점 영화관들을 넓혀갔습니다. 저는 이 영화들을 당시에 동시상영을 하던 인근 영화관으로 들락날락하다가 새 영화 없나를 보면서 점점 영화관을 넓혀가면서 다른 영화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태리의 마카로니 웨스턴" 이라던가 아니면은 또 국적불명의 "찰스 브론슨"과 "알랑 드롱"이 나오는 이상한 살인 청부 업자 이야기 같은 것들에 매혹되기 시작했었는데 사실 그러면서 제가 또 하나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은 그리고 이때 이제 처음 사람들이 팝송을 듣기 시작할 때인데요. 팝송을 열심히 들으면서 나는 앞으로, 사실 제가 먼저 가졌었던 꿈은 그 영화에 대한 꿈이 아니라 "락 기타리스트"가 되는게 제 꿈이었었습니다.

정은임

(웃음) 그러셨어요? 네.

정은임

그래서 제가 그때 존경했던 사람들 리스트에는 늘 올라오는 사람들이 이순신, 세종대왕 이런 사람들 보다는 "지미 핸드릭스", "제프 백" 그리고 "올맨 브라더즈"의 그 트윈 기타리스트 두 명의 형제 등등을 뽑으며 이렇게 될 수 없을까 라고 기타를 들고 기타학원을 전전하던 그 꼬마였었는데요. 이때 제가 보고 넋이 나가서 보면서 저희 아버님한테 이제 AFKN 너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 나오는 영화보지 말고 좀 자자라고 야단맞으면서 테레비를 부둥켜 안고 끝까지 본 영화가 칼라로 만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칼라 텔레비젼이 없는 바람에 흑백으로 본 "이지 라이더"였었습니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가 이렇게 신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봤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는데 그것은 제가 영화를 이해했거나 또는 그 60년대 정신을 이해했다기 보다는 그 락큰롤 음악이 신나게 흐르는 영화를 보면서 그 리듬에 흠뻑 취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이 영화와 함께 제가 중학교 때 베스트1으로 꼽는 영화는 "캐롤 리드"가 감독한 "제 3의 사나이"였었습니다. "제 3의 사나이"를 보면서 저는 처음으로 영화가 빛으로 만들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으며 수많은 그 영화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명장면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마지막 장면보다는 "조셉 커튼"이 "오손 웰즈"을 발견하는 장면이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장면에서 "조셉 커튼"이 "오손 웰즈"를 발견하면서 얼굴을 딱 보는 순간 빛이 얼굴을 보였다 그냥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서 마치 장면을 커트로 분할하지 않고도 그 두 개의 모습을 한 장면 내에서 보여주는 장면을 보고 그 당시에는 그저 그것을 분석적으로 보기보다는 "아, 빛이 저렇게도 쓰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깜짝 놀라며 매혹되었다시피하면서 보았었는데 그 "제3의 사나이"는 지금도 사실은 제가 다시 보아도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지 라이더"와 "제3의 사나이"를 보면서 사실은 중학교 생활 내내를 보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 70년대에는 그야말로 외화가 거의 수입되어있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는 외화는 1년에 거의 20편정도, 1년내내 개봉되는 영화가 20편이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처럼 한해에 개봉하는 영화 320편에 비디오 쏟아져 나오는 시절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영화광들은 그 때 또 영화볼데 없나를 그야말로 이 잡은 듯이 뒤지다가 발견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제 더 이상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프랑스 문화원"에 그 지하실 "살 르노와르" 였었습니다. "프랑스 문화원"을 발견하는 순간에 정말 모든 영화광들한테는 마치 보물섬을 발견하는 듯한 기분이었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때 처음 봤었던 영화는 고등학교 1학년때 12월달에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 그래서 11월달에는 매년 제가 "프랑스 문화원 몇주년하는 식"의 행사를 스스로 조촐하게 갖곤 했었는데 이때 처음 본 영화는 "금지된 장난"이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지된 장난"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격찬하는 것만큼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흑백 영화의 새로운 매력에 대해서 사실은 필름으로 본 것으로는 제가 "젊은이의 양지"에 이어서는 영화관에서 필름으로 본 것으로서는 첫번째 영화이기도 했었으니까는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 문화원"이라는 데를 열심히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10월달이었었습니다. 그 때 이름도 읽기 어려운 한 영화감독의 영화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 감독의 네 편의 영화를 한 달 내내, 그때 중간고사가 끼어 있어서 그 세 시간 시험만 끝나면은 끝나기가 무섭게 "프랑스 문화원"으로 달려가 1,2,3,4회, 12시부터 그 때는 시작해서 8시에 영화가 끝났었는데요. 그래서 집에다가는 도서실에서 공부한다고 내내 이야기하고서는 영화를 내내보고 마침내 토요일 날 마지막 시험을 볼때는 코피를 흘려가며 마지막 회까지 다 이 영화들을 보면서 저는 "평생 영화 찍어봐야 이 사람처럼 되긴 틀렸군." 이라는 생각에 영화감독이 되기를 포기한 그 영화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감독의 영화가 "장 뤽 고다르" 였었고 그때 제가 본 영화 중에서 저를 완전히 넉다운 시킨 영화는 "삐에로 미치광이" 라는 영화였었습니다. 1965년도에 만든 그 "시네마 스코프 화면"의 영화였었었구요, "장 폴 벨몽드"와 그 "안나 까레리나"가 나오는 영화였었는데, 한 그 결혼에 아주 질려버린 한 남자가 옛 정부를 만나서 무인도로 도망을 치다가 결국 무기 밀매상 조직에 끼어들어 다이너마이트를 머리에 감고 자폭하여 죽는다 라는 이 이야기를 그야말로 지금까지 저로서는 본 적이 없는 영화방법으로 어쩌면 지금 영화를 보시는 영화팬들에게는 이 영화가 그렇게 새롭게 보일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별로 다른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었던 그래서 헐리우드 영화와 또 한국영화들 일부를 볼 수 밖에 없었었던 저로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영화, 영화..." 라는 말 외에는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서 저는 "도대체 영화를 안하면은 나는 뭘할 수 있을까" 라는 참담한 심정이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그 다음 달 "프랑스 문화원" 프로그램을 받기 위해서 그 경복궁 길을 터덜터덜 가던 11월달. 문화원에 가기 바로 앞에 "도서 출판 기념 회관" 이 있습니다. 지금도 "도서 출판 기념 회관" 인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기념회관에 한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독일 영화와의 밤" 이라는 타이틀이었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 서독영화를, 서독에도 영화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상상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제에서 그런 영화들이 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볼 수 없었을 뿐더러 당시에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었습니다. 그래서 독일 영화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라고 들어갔더니 한 서독 영화 감독이 한국에 와서 1976년도의 일입니다. 1976년도에 한 서독 영화감독이 한국에 와서 자기의 영화들을 틀어주고 그리고 감독들과 대담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때 왔었던 영화가 "Im Lauf der Zeit 시간의 통과"라는 영화와 "도시의 알리스" 그리고 "페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 이란 영화였었고 그 때 아주 촌스럽게 장발머리에다가 70년대, 이런 표현들을 여러분들이 좀 용서해 주십시요. 아주 그 후진 라이방 이라고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요. 굉장히 촌스러운 그 썬글라스를 끼고 한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정은임

아~ 네(웃음)

정은임

그 청년이 바로 "빔 벤더스"였었습니다. 그 당시에만 해도 "빔 벤더스"는 거의 세계 영화계에선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그래서 "독일 문화원"의 주선으로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자기 영화 소개 하고 있었던 형편이었었는데 그 서독 감독을 저는 아주 낯선 얼굴로 보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이 그 "빔 벤더스" 의 인터뷰를 통역을 하고 있었고 또 한 명의 대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질문하기를 다들 촌스런 질문을 하고 있던 와중에 한 대학생이 벌떡 일어나

"당신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영국의 락 그룹 킹크스나 아니면 미국의 가수 반 모리슨의 노래를 사용하고 있는데 혹시 당신 영화가 이러한 아메리카 문화나 또는 팝 컬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닙니까?"

라고 묻자 "빔 벤더스" 갑자기 제대로 된 질문을 맞이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장광사를 늘어놓게 되는 것을 보면서 "별 대학생들이 다 있군."이라는 표정을 지었었는데 그 인터뷰 통역을 하고 있었던 대학생은 후일 지금 교육방송에서 "시네마 천국"이라는 프로를 진행하고 있는 그 후 제가 만나고 제가 선배로 생각하고 있는 "정유성 선배" 였었고 그 때 질문을 했었던 또 한 명의 대학생은 금년에 감독으로 데뷔했죠. "장미빛 인생" 으로 데뷔한 "김홍준 감독"이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영화광들은 별로 돌아다닐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노라면 서로가 다 만나는 형편이어서 사실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이 영화 써클을 통해서 만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심지어 고등학교때 같은 영화관에서 "파고다 극장"에서 "프렌치 커넥션"을 같은 회에 본 기억을 서로 나누기도 할 정도로 이상한 우정을 나누는 그런 시절이 사실은 이 70년대 학번들의 고등학교와 대학생 시절에 이상하게 걸쳐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가서는 하지만은 고등학교 때 만큼은 영화를 열심히 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 대학에 가서는 영화를 만드는 일에 더 열심히 였었습니다. 사실은 고등학교때까지 그렇게 열심히 보면서 "나는 대학교에만 가면은 영화 무지 열심히 볼거야" 라고 다짐을 했건만, 사실은 그렇죠. 정은임씨도 마찬가지시겠지만은 "대학에 들어가면 실컷 자야지" 라는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정은임

그런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데요.(웃음)

정은임

아, 그러세요. 공부를 굉장히 잘 하셨군요. 저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잠 실컷자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작 대학가니깐 전혀 졸립지도 않더라구요. 마찬가지로 대학가서도 영화를 열심히 봐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작 대학생이 되고 난 다음에는.

정은임

맞아요. 그건 저도 같았어요.

정은임

영화를 본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따분해졌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은임

다른 거에 관심이 더 갔었어요.

정은임

그러니까 대학생이 된 다음에도 남의 영화나 열심히 보러다니는 한심한 영화광 시절을 보내야 되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거의 저는 대학교 1,2학년때는 영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카메라 들고 다니며 영화 찍는 일이 더 열심이였었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본다라면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년동안 그 8mm 영화 네 편하고 16mm 영화 두 편을 찍으면서 친구들과 웃고 촬영다니고 싸우고 편집하고 밤새우면서 제가 군대가기 전에 발견한 사실은 저는 영화감독 될 재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은 스터디 그룹들을 열심히 짜서, 사실은 그 때, 텔레비젼으로는 하지 않았지만은 AFKN에서 그 때 방영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모은 것이 후일 KBS에서 했었던 그 "Paper Chase"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이였었습니다. 그게 왠지 그렇게 멋있어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우리나라에도 스터디 그룹이 그야말로 불붙듯이 번져나간 그런 유행을 경험하다시피 했었는데 이 때 열심히 보러 다녔던 곳은 사실은 "프랑스 문화원" 보다는 "독일 문화원" 에 더 열심히 다녔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독일 문화원" 에서는 독일 문화의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그 "Goethe-Institut"의 독일어 어학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한테는 유학을 보내준다라는 특혜조건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특혜를 갖고서는 유학 가는 학생들도 적지않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 "독일 문화원 산하" 에 있었던 영화 써클이 있었습니다. "동서 영화 연구회" 라고 있었는데요. 여기에서 많은 그 동료들과 또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많은 영화 평론가들 중에서 여러분들이 들으면 아마 이름을 알만한 사람들, 이를테면 "전양준씨", "강한섭씨" 그리고 영화 제작자가 되었죠. "안동규씨" 그리고 좀 전에 얘기했었던 그 "김홍준 감독" 같은 영화동료들과 선배들을 모두 그 이 "독일 문화원"에서 만나게 되었는데요. 이 때 늘 만나서 영화에 대해서 토론 대상이 되었던 감독은 "라느베르너 파스빈더"였었습니다. "파스빈더"는 당시 그 당시에 영화 청년들 사이에게서 정말 영웅이었었습니다. 그가 만들어 내는 영화에 대한 그 열정과 상상력 그리고 그 각 영화들이 갖고 있었던 완성도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영화를 갖고, 영화에 관해서, 영화를 빙자하여 세상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통로이기도 했었습니다. 아직은 아직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었던 시절이었으며 "유신 헌법"이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화에서, 한국영화에서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장이 나오는 장면이 우연히 한 컷트가 들어간다고 그러면 그 장면이 잘려나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작자와 감독은 "보안법"으로 구속되었던 시절이었었으며 여러분들은 지금 언제든지 책방에서 살 수 있었던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이라는 책이 집에서 발견되는 날에는 "이적 행위 및 간첩죄"로 구속되었던 시절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랬었던 시절에 어찌 대학생들이 모여서 모이기만 하면은 눈을 번득였던 시절이니 어찌 세상에 대해서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 많은 영화청년들은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이었었던 서독 영화를 빙자하여 서독 영화를 연구한다는 미명으로 분단상황에 대해서 많은 토론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었습니다. 특히 이때에는 아직 우리나라에는 좋은 영화책들의 번역이 거의 나와있지 않았었습니다. 구태여 영화책을 볼 수 있는 책이라면은 "영상적 사고" 또는 "영상의 반란" 그리고 "영화 예술"이라는 책이었었는데요. 사실 이때 처음 저는 체계적으로 영화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었습니다. 뭐 대학교 1학년 학생이 외국어 실력이 있으면 얼마만큼 있었겠습니까. 고작해야 예비고사 합격한 실력으로 외국어 외서를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같이 스터디하는 친구들과 함께 영어책과 일본어책으로, 특히 일본어 책에 많이 의존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외서는 수입한다는 것이 일본어 책들이 비교적 용이했기 때문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책들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고다르"가 "누벨바그"감독이며, 또 무성영화 시대 때부터 영화가 어떻게 흘러 왔으며, "채플린"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며, "그리피스"의 "국민 창생"과 "인톨로런스" 가 영화의 장을 열었으며, 그리고 소련에도 영화가 있었으며, "몽타지"라는 말이 소련 감독이었던 "에이젠슈테인" 이라는 사람이 그의 동료들과 작업하는 과정속에서 철학적 개념을 부여하여 새롭게 하나의 영화철학적 용어로까지 발전시킨 용어이며, 1930년대에 수많은 영화들이 있었으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벤허"가 영화 사상 최고 걸작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도 이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보니 사실은 지금 영화를 공부하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행복한 시절에 살고 계십니까? 그런 점에서라도 여러분들은 마땅히 저희 세대를 밟고 넘어서야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영화공부 밖에 못한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이겨내지 못한다라면은 저는 한국의, 한국에서의 영화의 발전이란 것은 정말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이 또래 세대들 중에서 80년도를 편하게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80년도 5월달에 군대를 가서 82년도에 제대를 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아주 어둡고 우울한 동료들과 함께 보내지도 못했고 또 많은 친구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국으로 떠났고 또 제 친구중에 몇몇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 계속있는 친구들도 있는데요.

이 당시에 군대에서, 아주 굉장히 창피한 이야기를 드리자면은 저는 군대에서 제 생애에서 가장 책을 열심히 읽었던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영화 보지않고 책만 읽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매맞으면서 읽는 책이니까 사실은 기억에 더 많이 남았고 밤에 밤 잠 못 자면서 이 책 내가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책을 읽어서 그런지 몰라도 사실은 더 기억에 남는 책들이 이 책들이었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가면서 제가 맹세한 것 중에 하나는 저는 29개월 군대생활을 했었는데요. 29개월 동안에 한 달에 두 권씩 책 읽으면은 58권을 제대하기 전까지 읽을거야 라는 생각에 열심히 읽었고 사실은 이 기간 동안에 29개월 동안에 제가 제대하면서 마지막으로 읽었었던 그 책이 "에밀 뒤르켕" 책이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제 기록으로는 65권째 책으로 기억에 남았었고 사실은 그 이후에 이만큼 공부 열심히 안한 자신을 저 자신을 굉장히 창피하게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제대하고 난 다음엔 전 외국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크게 관심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대부분의 영화광들이 먼 길을 돌아서 다시 자기의 영화로 돌아오는 것이기도 할 텐데요.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바로 저는 이때부터 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한 영화감독들이 그 당시에 대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는, 아마 지금은 거의 왜 그랬을까라고 지금 세대들은 반문하시겠지만은 그 당시에는 "바람 불어 좋은 날"로 그 당시에 시대 정신을 반영하면서 또한 그 억압받은 많은 세대들의 대변자 역할을 했었던 "이장호 감독"이 정말 우리 시대의 대변인처럼 느껴졌었던 시절이기도 했었습니다. 제 선배와 동료들은 그,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로 그 때 들어갔었었고 그리고 "이장호 감독"에게 인사를 했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과 "이두용 감독"에 대해서 제가 열광적인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도 또 이때부터였었습니다. 사실은 저는 제 생애 영화의 베스트 다섯편 그러니까 완성도나 이런 것을 떠나서 제 마음속에 남는 영화 다섯편을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이때 봤었던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은 저를 거듭거듭 다시 한번 영화광으로서가 아니라 영화를 정말 내가 영화를 해야겠구나 라는 그 결심을 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그 한국 영화를 보면서 보냈었던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보냈었던 시절, 이런 시절들도 어떻게 생각한다라면은 행복한 시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은 사실은 학교를 다니면서 또는 학생의 신분으로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자신이 고생스럽고 고민한다 할지라도 어떤 점에서는 굉장히 어떤 하나의 자기가 집중할 수 있었던 시절이기도 할 것입니다. 자기가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괜찮고 그리고 마음껏 외국에 나가서 영화도 볼 수 있고 유학도 다닐 수 있는 좋은 부모님을 만난 분들이라면 아마도 계속 그런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저는 그런 혜택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곧 직장을 갖게 되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첫 직장은 영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직장이었었습니다. 저는 아침 8시까지 직장에 나가야 됐었고 일찍 끝나면 아홉시였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회 영화도 도저히 볼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회 시간을 놓칠 때마다 저는 초조한 생각에 어찌할지 모르는 표정을 짓다가 매번 욕을 먹던 그런 직장생활 잘 못하는 사회생활 초년병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날이라면 행여나 놓칠까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프랑스 문화원"에 가서 영화를 보다가 "로베르 브레송" 영화를 보다가 실컷 쿨쿨자다가 나오면서 못내 아쉬워하며 버스 간에서 눈물지으며 돌아오던 그런 사회 초년병이기도 했었습니다. 마지막회 영화를 보는 날이면 너무나 신나서 달려가 보던 영화가 "고스트 버스터즈" 같은 영화였었으며 제 선배와 함께 영화를 그토록 하고 싶었던, 그 선배도 결국에는 직장에 들어가서 직장 생활을 고생고생하며 1월 4일날 만나서 같이 보러간 영화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였었으며 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를 보고 "명보극장"에서부터 그 기나긴 을지로의 지하철도를 내내 걸어가면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그 선배와 부둥켜 안고 "우리 왜 이렇게 살아야되요?" 라며 울고 헤어지던 것이 바로 그 시절이기도 했었습니다.

어쩌면은 영화를 편하게 보시는 여러분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영화를 편하게 보신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축복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영화와 본의와 관계없이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결코 부족한 영화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상업 영화를 보러가고 코메디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이 결코 타락한 영화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14시간 일년 내내 노동시간에 허덕거리면서 어쩌다가 선택할 수 있는 그 사람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를 그 사람보고 "고다르 영화"를 봐야하며 "레오스 까락스 영화"를 봐야된다 라고 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죽으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 재미있는 헐리우드 상업영화를 보러가도 마지막회 마지막 시간에 숱한 시간 저는 잤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이 아파서 눈에서 눈물이 나와서 견딜 수 없어 눈을 감고 눈이 아프기를 멈추기를 기다리다가 그만 깜빡 잠들어 눈 떴을 때는 옆사람이 '영화 끝났으니 나가십시오' 라고 흔드는 시간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혜택을 받았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을 비판한다라면은 그것은 이 땅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비디오가 들어오기 시작하여서 비디오를 통하여 외국에서 보내준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던 것이 또한 이 시절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해 겨울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더라도 영화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를 하기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은 제 인생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제가 삶에서 반칙을 하지 않는다는 한도내에서 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 영화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약속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저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께 말씀 드리는 이유는 이 시간이 여러분들과 아마도 그 마지막일 것이어서 말씀 드립니다. 프로개편이 되었고 그리고 2년동안 제가 여러분들과 만났고 사실은 여러분들에게, 제가, 저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으시지만 또 "이제는 좀 이 친구 지겨우니 그만 좀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빗발 치듯 편지가 오는 것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선 아마도 이 이야기는 희소식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아마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분이 다음주부터 여러분들을 찾아 뵐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을 저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비판해 주셨던 분들도 또 저를 격려해 주셨던 분들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영화를 좋아하시는 여러분들 혹시 압니까? 여러분 옆에서 영화관에서 여러분들이 영화를 보시면서 "이것도 영화라고!"하며 콜라를 집어던지고 나갈 때 옆에서 빙긋이 웃으며 "맞아요"라고 하는 사람이 "저"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영화관에서 언제나 언제나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정은임

예. 정성일씨가 꼭 마지막 인사처럼 말씀해 주셨는데요. 글쎄요. 그동안 참 좋은 얘기들 많이 들려주셨구요. 아마도 지금은 정성일씨가 재충전의 시간을 위해서 저희 프로를 잠시 떠나는 것이고 다음에 또 좋은 이야길 위해서 저희 이 시간에 다시 오실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 동안에 참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셔서 저도 옆에서 도움이 많이 됐고요. 여러분도 많이 도움이 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동안. (웃음)

정은임

그동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궁금해하시는 질문, 제가 하나 대답해 드리고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숱한 질문을 올리시죠? 정은임 아나운서가 정말 모든 것을 자기가 생각해서 멘트를 하고 있으며 또 그만큼 방송에서 하는 만큼 아주 영화에 대한 열정적인 영화광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제가 2년동안 아주 냉정하게 지켜봤는데요. 대답은 "예스"입니다.

정은임

(웃음) 모든 멘트는 아니구요. 자, 정성일씨한테 많은 도움 받았구요. 오늘 마지막 곡도 정성일씨가 직접 고르신 곡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곡을 가져 오셨어요?

정은임

그 프랑스의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 소문 났었던 "몰리에르" 그, 희곡 작가 "몰리에르"에 관한 생애를 그린 영화인데요. 이 영화의 맨 마지막의 "몰리에르의 죽음"이라는 대목을 "헨리 퍼셀"의 곡 중에서 "킹 아서"에 관한 곡 중에 하나를 "알프레드 델러"가 직접 지휘하여 들려주는 곡인데요. 사실은 "이야기꾼의 죽음"에 관한 이 영화의 마지막이 왠지 저의 작별인사와 어울리지 않으십니까?

정은임

(웃음) 아유, 무슨 말씀을 참. 자, 정성일씨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구요. 저는 아마도 정성일씨를 계속 만나는 기회는 있을 것 같습니다. 자, 헐리웃 영화음악 CD는요. 서울 송파구 가락 2동에 원상균씨께 띄어 드리구요. 오늘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정성일씨 안녕히 가세요.

정은임

감사합니다.

정은임

예,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