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임의 FM영화음악』 2004.01.14.본인인터뷰|시론

FM 씨네마떼끄 정성일편 - 영화의 지난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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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

FM 씨네마떼끄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 모시고 열정적인 목소리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성일

안녕하세요.

정은임

네. 지난 주에 우리 시대의 씨네필 문화에 대해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고나서 굉장히 여러가지 반응이 있었고 또 정성일씨께도 개인적으로 많은 팬이나 혹은 독자, 청취자들이 메일을 보냈다고 들었어요.

정성일

아마도 제게 메일을 보내주신 분들은 저의 팬이라기 보다는 정은임씨의 열렬한 팬들이실 터인데 씨네필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물론 반대의 견해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지지의 견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가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분의 견해였었습니다. 아마도 그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면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한 분은 강성훈씨이시구요 또 한분은 고윤숙씨이십니다. 두 분의 견해를 짧게 소개하자면 강성훈씨의 견해는 단도직입적입니다. 편지가 정말 도착한 것인가, 그러니까 정말 목적지에 온 것일까, 정영음이라는 그 목적지에 정말 온 것일까, 혹시 그것이 우연의 변증법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그것이 마주침의 목적론이 아니라고 정말 말할 수 있는가, 혹시 그런 목적론을 통해서 탈정치화 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더 나아가 실천에 대해서 직무유기를 위한 면죄부를 발부하는 것이라면 그 씨네필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지 않겠는가, 결국 강성훈씨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실패한 마키아벨리즘' 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논쟁에 좀 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제 생각에는 강성훈씨가 쓴 이 마키아벨리즘은 알튀세르가 얘기한 우연의 변증법을 끌어들이신 것 같습니다.

고윤숙씨는 좀 더 제게 직접적으로 질문하셨습니다.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자생적 씨네필이라는 존재들도 사실상 자본의 구도 안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좀비처럼 기어나왔다면 사실상 진보가 후퇴하고 비정치적인 보다 자본의 안전한 구도 안에서 문화를 재통합하려는 '보수주의에의 회귀' 가 아니겠는가 라고 씨네필들에게 직접적으로 반문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씨네필 문화에서 실천이 없다면 이것은 대중들의 재빠른 역사에 대한 보수반동주의역사의 회귀가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좀 더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벽 3시에 나누기에는 적합한 테마가 아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 시간까지, 이 27시까지 깨어있으신 분들이라면 저는 이 이야기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들에 대한 신뢰이고 믿음입니다.

제 생각에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영화를 통해서, 영화를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란, 그 행복이란 그것이 크면 클수록 현실로부터의 괴리에 빠지고 환상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의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씨네필들에 대해서 던지는 많은 정치적 담론들의 질문은 제 생각에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소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러한 논의를 시작할 때 어떤, 영화가 현실로부터 괴리되어서 환상을 파는 것이라든가 혹은 사회에 대해서 영화가 하나의 거울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를 그대로 담고 있다라든가 어느 쪽이 되었건, 왼쪽이 되었건 오른쪽이 되었건 저는 그런 식의 기계적 도식주의에 사로잡히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더군다나 그것을 통해서 논쟁을 행여나 계몽주의적 환원에로 이끌려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는 세상 바깥에서 만들어져서 여기 도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화는 어떤 영화라도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영화일지언정 또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영화일지언정 세상 안에서 만들어져서 우리 앞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결국 세상이라는 환상의 구조에 대한 그 어떤,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저는 '증후기호'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증후기호가 이상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화는 세상에 대해서 그 자체의 반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한번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자, 여러분들께서 이것이 쉽게 논쟁에 따라붙기 어려우실지라도 저는 이것을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함께 영화를 얘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꺼이 여러분들께서 안으로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저는 세상이라는 실제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거기에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그 세상이라는 구조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그것을 영화를 보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그 세상의 구조에 대한 어떤 목적론적 원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환상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해서 그것이 충족되는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갖는 환상에는 언제나 블랙홀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블랙홀을 채워넣기 위해서 어떤 사람에겐 문학이,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이, 어떤 사람에게는 회화가 그리고 저 같은 사람에게는 혹은 여러분들에게는 영화가 동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과격하게 도식화시키자면 철학이 블랙홀의 존재론적 근심이라면 제 생각에 예술은 블랙홀에 대한 승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영화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영화의 자리에 서서 저는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세상이란 영화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영화라는 것은 세상이라는 영화를, 영화라는 기계장치를 통해서 찍는 겁니다. 그래서 영화라는 기계장치를 통해서 세상이라는 영화를 다시 배열하고 이것이 미장센이겠죠. 다시 조합하고, 그것이 몽타주겠죠.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나누거나 합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감각을 빼거나 더하면서, 이것이 영화의 테크놀로지겠죠. 그렇게 블랙홀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말하겠습니다. 결국 같은 말이지만 삼류 영화가 넘쳐나는 것은 세상이 삼류이기 때문인 겁니다. 혹은 한 나라의 영화가 대부분 삼류일 때는 그 나라가 삼류이기 때문인 겁니다. 여러분들 영화를 보시다가 '왜 영화들이 다 이 모양이야, 왜 이렇게 조폭 영화가 넘쳐나는 거야, 왜 이렇게 말이 안되는 코미디들이 넘쳐나는 거야' 할 때에는 그 나라가 조폭 국가이고, 그 나라가 말이 안되는 코미디 국가이기 때문인 겁니다. 세상이 삼류인데 영화가 일류이면 그 영화는 사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저는 그러니까 영화는 결국 세상의 질서, 세상이라는 사막에 대해서 세워진 일종의 세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렇다면 반문할 것입니다. 영화의 희망은 없는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결국 모든 것은 패배로, 세상에 대한 실망으로 이끌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이렇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기 마지막 판도라 상자의 마지막 순간까지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우회하겠습니다. 19세기는 발명의 시대였었습니다. 정말 많은 것들이 발명되었습니다. 전기에 관련된 수많은 발명품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전화, 축음기, 전구, 영화 수많은 것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백년이 지나간 다음에 돌아봤더니 오직 영화만이 예술이 됐습니다. 여러분들은 전화기를 들고 예술한다고 얘기하진 않을 것입니다. 전구를 켜면서 예술이야라곤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화만이 백년을 돌이켜 봤더니 예술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처음에 과학적 발명품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구경꺼리가 된 그 어떤 상품으로, 이윤이 창출되어야만 구경꺼리가 보여질 수 있는, 만들어질 수 있는 상품으로 세상에 자기의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술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 영화의 비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다소 끔찍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사실을 저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상품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겁니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헐리우드영화 제작자들이였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예술인데 헐리우드가 그것을 저속한 상품으로 만들었어라는 말은 본 말이 전도된 얘깁니다. (그렇죠) 태어나길 상품으로 태어났는데 그것이 예술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영화에 대해서 시대착오에 빠진 혹은 과대망상에 걸려든, 그래서 영화에서 그 어떤 신기한 가능성, 어떤 마술과 같은 것, 그것을 보았던 몇몇 사람들, 즉 영화가 예술이라고 믿었던 그 사람들이 영화를 정말 예술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정말 보호하고 지지해야 될 것은 영화가 아닙니다. 그 영화를 예술로 만든 인간인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빠져들고, 물신주의에 휘말려들고, '영화가 위대한 것이야' 라고 하염없이 얘기할 때 우리는 종종 물신주의에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또는 장사꾼의 논리에 휘말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영화를 예술로 만든 인간들의 영혼이어야 되는 겁니다.

저의 믿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영화에 있어서의 전투도 여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상업성과 예술성의 공존이란 표현, '영화는 예술적이기도 하지만 상업적이어야 해, 대중적이어야 해, 대중들도 재밌어야 돼', 라는 말은 얼만큼 모순된 말이냐면 세상에서, 이런 표현을 새벽 3시에 용서하십시오,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공존할 수 있다' 는 믿음 만큼이나 모순에 찬 표현이 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저는 말했습니다. '소통하라' 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영화와 소통하려는 노력은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왜? 영화란 결국 세상이고, 세상이란 결국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반문합니다. 영화는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야지 돼? 결국 영화는 재밌으면 되는거야. 그 말은 저에게 이렇게 들립니다. 세상은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니야? 신문을 보면서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 정말 한국에서는 사건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구나'. 그러자 제 옆자리에 계시던 분이 웃으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게 한국에서 사는 재미죠'.

자, 사실상 가장 잔인한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라 코미디영화인 것입니다. 사정없이 내려치고 자빠지고 때려도 공포영화는 비명이나 지르지 코미디영화는 웃어야 됩니다. 세상의 비참함과 잔인함이 웃기다면, 정말 웃기게 생각하신다면 그냥 그렇게 재밌게 사셔도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 이 말이 지나칠지 모르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재밌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회사에서 짤리고, 누이가 팔려가고, 동생이 집에오는 밤길에 조폭에게 마흔두번 칼에 찔려도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게 재밌다고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정말 영화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매우 끔찍하고 비참하게 여겨집니다. 그걸 재밌다고 낄낄거리며 볼 때 저는 그 웃음소리가 영화관 안에서 일종의 비명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러분들의 영화에 대한 사랑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옮겨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은임

예, 자, 십여분 혼자 말씀하셨어요. (웃음) 일단 오늘은 청취자들이 지난 방송에 대해서 정성일씨께 다시 되물어오신 것에 대해서 대답으로 시작했습니다. 왜 씨네필이 중요하고, 왜 자생적 씨네필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길 해야만 하는가, 왜 그렇게 영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심각하게 혹은 영화주의자처럼 이야길 해야만 하는가, 그런 모든 것에 대해서, 그리고 씨네필들이 결국 현실에서 유리되어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가 아닌가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주셨는데, 음, 일단 한가지 제가 건진 것은요 여전히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가 싸워야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것은 영화를 보고서는 왜 우리가 편하게 보는 영화를 가지고 우리는 전투적인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에게는 오늘 이 방송을, 정성일씨의 방송을 혹시 녹음한 게 있으면 그 앞을 한 번 다시 들어주세요라고 밖에 말을 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일단 영화가 회화나 혹은 문학이나 그 밖의 여타 장르와는 매우 다르게 시작한 발명품이라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돈이 개입되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영화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싸울 수 밖에 없다는 것, 영화의 제 모습을 혹은 제 모습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런 말씀들을 쭉 해주셨는데, 정리하기에는 좀 역부족이구요, 중간중간에 질문으로 끼어들었어야 되는데 정말 감이 떨어졌네요. 오랜만에 만나뵈니까. 질문을 제때 못 드린 것 같애요. 음악을 듣고 이번에는 한번 제때 질문을 드려볼까요?「어둠 속의 댄서」가운데 들어봅니다. Björk 의 "I've seen it all".

"I've seen it all" written by Björk

정은임

라스트 폰 트리에 감독의「어둠 속의 댄서」중에서 Björk 의 "I've seen it all" 들어봤습니다. FM 씨네마떼끄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함께 하고 있는데요, 뭐랄까, 음, 정성일씨 제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방송에서 만나뵜습니다. 좀 더 핵심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좀 더 직설적으로 되셨구요, 좀 더 핵심으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문제는요, 변방에서 다른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때와 중심의 근본적인 이야기, 혹은 원리에 대해서 얘길 하면 그 때부터 논쟁거리가 엄청나게 또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럴꺼라는 생각이 또 들어요. 오늘 무슨 말씀 계속해 주시겠어요.

정성일

지난 주에 제가 정영음을 들었던 여러분들에게 씨네필의 자리에서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바로 그 반대편, 그러니까 영화의 쪽에 서서 8년동안 무엇이 새롭게 우리들의 화두로 던져졌고 그것에 대해서 얘기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8년동안 즉 영화를 보는 당신이 기다리며 지내왔었던 그 영화의 8년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이제 영화저널을 읽고 사이트를 뒤지면서 공식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8년간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생각하는 매우 사적인 정리이자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저의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 지난 8년동안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는 '디지틀' 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지틀은 근본적으로 영화의 미학에 대해서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 이전의 영화들과 디지틀 영화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했었을 때 긴 시간동안 고민했었습니다. 그런데 김소영 선생이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저에게 그런 얘길 했습니다. 결국 디지틀 영화와 그 이전의 영화의 차이점은 회화에서 얘길하자면, 예전의 영화들은 마치 회화에서 프레스코화들처럼 거장들이 필요했었던 그림, 그러니까 다빈치나 라파엘로 아니면, 물론 정은임씨가 훨씬 더 많은 이름을 열거하실 수 있을 터인데 미켈란젤로나 베르메르 같은 또는 지오토 같은 그런 거장들이 거대한 스튜디오 안에서 수많은 도제 제자들을 거느리고 충분히 생각해본 다음에 덧칠을 허용치 않는 단 한번의 그림으로, 그 위대한 붓터치로 걸작을 만들어내는 것이 마치 그 시대의 그림들이었고 또 아날로그 시대의 그림들이었다면, 디지틀 영화는 회화에서 캔버스가 나오고 유화가 등장하자 화가들이 그것을 들고 세상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빛 안에서, 그 빛을 그려내기 위해서 새롭게 시작했었던 인상주의의 그림들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디지틀이 되면서 영화는 그 작은 기계 하나에 그 거대한 스튜디오를 다 들고 거리에 나와서 손으로 찍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쓰시는 최신 디지틀 기종을 사시면 여러분들은 라스 폰 트리에가「백치」들을 찍었을 때 보다, 토마스 빈테부르크가「셀레브레이션」을 찍었을 때 보다 훨씬 좋은 기종으로 영화를 찍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디지틀 카메라로 영화를 못찍으면 이제 여러분들은 어디에다가 하소연도 못합니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재능이 없는 겁니다.

정은임

그러니까 이제 영화의 모짜르트도 나올 수 있어요.

정성일

아마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굉장히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YMCA에서 영화를 지도하다가 한 친구가 찍은 영화를 봤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데 4시간짜리 영화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정말 잘 찍었어요. 그래서 이 친구에게 제가 '넌 앞으로 뭘 할거니' 했더니 이 친구의 대답이 '예, 저는 영문과에 가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라고 얘기하자 '집에서 영화하는걸 반대하니?' 그러자 '아니요' 라고 이 친구는 두 눈을 똥그랗게 떴습니다. '그러면 4시간 동안의 영화를 만들 정도로 열정이 있는데 왜 영화감독이 될 생각을 안해?' 라고 질문하자, 이 친구는 너무나 의아하다는듯이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기를 잘 쓰는 사람이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죠?'

저는 디지틀 카메라는 이제 우리 세대에게, 우리 어린 세대에게 마치 일기장과 같은 것으로 도착한 셈입니다. 저는 그 속에 디지틀 영화가 한편으로는 예술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그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양쪽에 분산배치되고 점점 더 뿌리내려가듯이, 잔가지 뻗어나가듯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에 있어서의 디지틀이 단지 라스 폰 트리어가 만들어낸 도그마 영화들,「백치」들에서 여러분들이 작년에 보셨던「도그빌」같은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어아어마한 예산을 요구하는 디지틀 영화들도 역시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지틀 영화가 저예산이라는 것은 오해입니다. 바로 조지 루카스가 새로 시작한 세 편의「스타워즈」가 모두 디지틀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하고 있는 영화가 예를 들면 장 피에르 주네의「아멜리에」같은 작품입니다.「아멜리에」의 작업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아멜리에」의 원래의 화면은 여러분들이 본 것과는 전혀 딴 판인 화면이었었습니다. 그걸 찍어놓고 후반 작업으로 거의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여 그림책처럼 만들어놓은 셈입니다.

자, 이렇게 디지틀 영화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 디지틀 영화들에 대한 새로운 사고, 새로운 실험들이 거듭되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제가 생각하기에 디지틀 영화의 가능성을 미학적으로 극단까지 밀고 나아갔었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은 두 편이였었습니다.

한 편은 여러분들께서「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혹은「올리브 나무 사이로」같은 작품들로 잘 알고 게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찍은 텐 아라비아숫자로「10」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열이라는 숫자 즉, 10으로 시작해서 9 8 7 6 으로 쭉 나가고 영화 전체가 모두 열 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화 상영시간은 모두 1시간 50분 정도인데 영화는 시종일관 작은 차 안에서 벌어집니다. 그 작은 차 안에 키아로스타미는 말 그대로 이란의 모순을 한 자리에 모두 끌어모아서 압축시키다시피 찍어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제작, 감독, 각본, 촬영, 녹음, 편집을 모두 혼자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디지틀 카메라 하나를 자기가 들고 들어가서 모두 다 해낸 겁니다.

정은임

그야말로 원맨 밴드예요, 이제.

정성일

예. 맞습니다. 말 그대로 혼자서 다해내는 그런 영화가 정말 가능해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해서 키아로스타미는 자기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정말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였었는데 마치 자기가 영화가 맨 처음 도래했었던 1895년 12월 27일에 뤼미에르 형제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도 했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재작년 깐느에 왔었던 한 편의 영화라면 또 한 편의 극단적인 디지틀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작품이 알렉산더 소쿠로프의「러시안 아크」즉,「러시아의 방주」라는 작품이였습니다. 이야기는 빼쩨스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무대로해서 170년에 이르는 역사극을 260명의 등장인물을 동원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찍었습니다. 영화 전체를 소쿠로프는 단 한 테이크로 찍었습니다. 원 쇼트 영홥니다. 영화 시작해서 1시간 50분을 카메라가 홀린듯이 복도를 쫓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온갖 사건과 이야기와 벌어지는 일들을 쫒아가고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들이 무도회장에 모여서 춤추는 것으로 영화가 화려하게 끝납니다.

정은임

사전에 뭐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죠?

정성일

어마어마하게 했겠죠. 그래서 제가 놀란 것은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찍은거야 즉, 이미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다들 깐느에 영화선수들이라는 사람들이 정말 한 쇼트로 그렇게 찍었을까, 트릭이 있을꺼야 라고 몰려갔다가 정말 한 쇼트만에 끝내자 영화가 끝나고 브라보라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었습니다.

정은임

연극같은 영화네요, 그야말로. (그럴 수도 있겠죠) 심지어 중간에 막도 내리지 않고, 한번에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간 그 연극...

정성일

...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놀라운데요) 제가 놀란 것은 그러고 나서는 나중에 스탭들이 올라오는데 촬영감독 28명, 조명감독 46명. 스탭들이 아니라 감독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 각 감독들 아래 게퍼들 그러니까 스탭들이 또 잔뜩 붙어서 이름들이 따라서 올라옵니다. 그러니까 한 쪽에서는 원맨밴드 영화를 찍고 또 한 쪽에서는 디지틀이라는 무기를 들고, 디지틀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들고 거대한 실험을 가능하게 만든 겁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벽화같은 영화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서로 반대의 영화를 통해서 디지틀이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미학적 가능을 통해서 디지틀은 앞으로 더 얼만큼 더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을지 우리에게 정말 무궁무진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즉 디지틀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자면 자, 씨네필에 대한 답변을 드리면서 한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디지틀 영화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디지틀 영화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네트워크, 즉 인터넷과 동시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 영화는 바로 이러한 디지틀을 요구하는 새로운 지각 효과들은 인터넷들이 세계를 하나의 망으로 만들고 있는 그것과 저는 결코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사물에 대한 디지틀은 시간공간의, 시공간의 새로운 체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즉, 디지틀 영화는 이것과 함께 우리들에게 새로운 지각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자본의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영화상영방식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즉, 상영방식이 바뀔 때 영화의 배급에 대한 근본적인 지각변동은 쫓아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는 옛 선현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자면, '돈을 버는 것은 생산으로 버는 것이 아니라 항상 유통으로 버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잉여가치는 배급구조에서 나오는 것이지 제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떤 새로운 변화가 저는 어디까지 즉,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 저는 정말 이제는 우리가 그 대차대조표를 냉정하게 따져보기 시작해야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이 디지틀 영화는 영화에 있어서의 예술성만 풍요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디지틀이 영화로 건너오면서 영화가 원래 갖고 있었던 예술적 성격이 아니라 미디어적 성격을 훨씬 더 큰 영향력으로 획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VJ들의 등장이 바로 그 예일 것입니다. 디지틀 캠코더는 말하자면, 그 유명한 말 '항상 사건 현장에 있다' 는 겁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거기에는 디지틀 캠코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디지틀에 대한 앞으로의 새롭게 나아가야될 방향인지 아니면 예술의 영화에 대한 종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정은임

예, 사실 2천년 벽두에 디지틀이 영화계에 도착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디지틀의 그 양 끝에 라스 폰 트리에와 조지 루카스가 있다, 그러고 그 안에 수많은 그 게릴라 같은 혹은 민주적 전사 같은 그 카메라를 들고 세상 밖으로 뛰어나온 작은 영화인들이 있다고 이야길 했는데 저는 디지틀이 오히려 벽화와 같은 예전의 영화작업을 무너뜨리고 캠버스를 그냥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디지틀을 갖고 거대한 공공벽화를 다시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길 들으니까 사실 그 하나의 매체를 가지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것은 한 사람의 생각의 범위를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과연 정말 그 유통배급의 문제까지 생각을 해본다면 제작의 측면을 떠나서 그게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지금 디지틀 상영관이라는게 지금 서서히 생겨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인터넷 상영관은 접어두고요. 디지틀 배급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정성일

제 생각에 두 개의 양 극단을 생각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이제까지 그 필름으로 상영하는 기존의 영화관들이 바꿀 수 없다고 버티는 까닭은 바꾸는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꾸는 방법은 사실상 너무나 간단합니다. 동시에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모든 영화의 배급방식을 디지틀로 바꾸로 디지틀로 상영하는 방식을 위성을 통해서 전세계 동시개봉을 앞으로 목표로 하겠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올해「스파이더맨2」를 우리는 디지틀로 인공위성을 통해서 단번에 전세계 동시개봉방식을 택하겠다하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모든 극장들은 다 바꿀 것입니다. 이것은 방법이 없습니다. 즉, 전세계 영화들의 표준모델은, 기계적인 표준모델은 결국에는 헐리우드 영화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겉으로 드러난 거대자본의, 제국의 하나의 표현이라면 또 하나는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알고 계신 즉, 모든 사건 현장에는 항상 디지틀 카메라가 있다고 했었죠, 그 카메라가 가장 작아지면 뭐가 됩니까. 몰카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몰래카메라의 형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24시간을 감시하는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그 감시 사회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사회는 점점 더 노출증에 걸려갈 것입니다. 이것이 디지틀의 정신분석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은임

그 디지틀의 양극단을 가보면요, 사실 비관적인 전망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애요. 혹시나...

정성일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이상한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서) 네. 그 이상한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저는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에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디지틀 영화 시대에 정말 중요한 것은 제 생각에는 아무 엄격한 의미에서의 윤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는 새로운 21세기 디지틀 영화의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은임

네. 새로운 정치경제학으로서의 윤리학, 그런데 그 윤리학이라는 것이요 경계와 사람과 기준에 따라서 너무나 모호하기 때문에, 아, 상당히 어렵네요. 인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 디지틀 영화의 양 극단 중에 한 곳에 있죠.「스타워즈 에피소드 I」, 거대자본이 들어간 디지틀 영홥니다. John Williams 의 음악 한번 들어볼까요? "Dual of the fates"

"Dual of the fates" composed by John Williams

정은임

「스타워즈 에피소드 I」중에서 John Williams 의 음악 "Dual of the fates" 들어봤습니다. 자, FM 씨네마떼끄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자, 아주 달라진 영화계, 영화문화 그 중에서 첫번째로 꼽으신 게 디지틀의 도래라고 말씀하셨어요.

정성일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두번째 그 8년간의 변화에서 얘기하고자 함은 서구유럽영화의 침묵에 대해서 입니다. 사실상 2차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로 유럽영화를 나누기도 하는데 또는 서구영화를 어떤 하나의 기점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어떤 점에서는 2차세계대전 이후 서구영화는 꿈에 빠져들어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헐리우드와 서구유럽영화는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헐리우드는 전쟁이 끝나자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그 즐거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영화는 파시즘이라는 악몽을 꾸고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유럽영화가 성찰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지에서 성찰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파시즘이라는 전대미문이라는 환상 속에서 그 유럽영토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놓은 과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그 쑥밭이 된 영토를 고스란히 재현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화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면 아무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찍어도 결국 현실이 찍힐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서구영화는 그것에 대해서 피하기 위해서 결국 시간이 옆이라는 화두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즉 1960년대 누벨바그 영화들이나 1970년대 뉴저먼시네마 혹은 80년대 누벨이마쥬 이 모두들 현실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랬었던 이 유럽영화들이 90년대에 들어서자 불현듯 갑자기 고전주의에로, 예술적 고전주의에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영화의 고전주의가 아니라 예술적 고전주의라 말했음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고전이라함은 이 유럽영화들은 영화 이전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자체를 질문기 시작했습니다. 영화가 성립되기 시작한 지점과 1895년 이전 영화가 성립되지 않는 지점은 어디인가. 아마 이것이 다음주에 제가 이야기드릴 아시아영화와 서구유럽영화가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그 어떤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준점을 나눠놓고 영화가 성립되는 것과 성립되지 않는 지점을 이야기하는 바로 이 질문이 유럽통합의 움직임과 동시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여러분들께서는 주목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 안에서 유럽영화들은 서구유럽영화들은 내셔널시네마, 그러니까 민족국가영화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그 질문을 무력화시켜버리고 거꾸로 근본주의에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가능한 영화, 그러니까 유럽서구영화들이 불가능한 영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영화들에 매달리게 된 대표적인 감독들은 마뉴엘 데 올리베이라 라든가 아니면 호아르 세자르 몬테이로, 이 감독은 작년에 마지막 유명을 달리했었는데 혹은 이러한 거장감독들로부터 아르노 데스쁠레셍 같은 젊은 감독들에 이르기까지 그 불가능성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씨넴 엥페페' 라고 부르는 불가능의 영화라는 새로운 영화의 개념이 90년대 유럽영화의 매우 핵심적인 논쟁의 대상이 된 겁니다.

즉, 이제 영화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아니라 유럽문화역사 안에서 영화를 성립시킨 그 내재적 환경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제 생각에 어떤 문화적, 역사적 그러니까 문화역사적 환원주의의 유령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도그빌」에서 불현듯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의 무대를 그냥 연극처럼 만들어놓고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립시키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사실상 연극이라는 제도이고 연극이라는 전통인 것입니다. 점점 더 서구유럽영화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면 그러니까 그 문화역사적 환원주의의 전통을 보지 못하면 그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매우 애매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매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중적인 영화관객들은 점점 더 애매할 것이 없는 헐리우드 영화에로 이끌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지만 같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성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 관객들은 아시아 영화보다는 그냥 우리들의 문제에 매달려서 한국영화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잘 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도 정말 그게 좋은 일인가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아시아 영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관지어서 한국영화가 동시대의 다른 영화들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자 지난 주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은임

네. 지금 유럽의 영화, 헐리웃의 영화, 한국영화, 아시아영화, 이렇게 구분지어서 말씀해주셨는데 정체성이 분명히 그만큼 있나요?

정성일

사실은 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90년대 영화학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였었습니다. 그러니까 내쇼널시네마, 국가민족영화라는 그 개념이 들어와서 그것이 정말 성립가능한 것인가, 글러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부르는 지구촌화 시대에 있어서, 세계화 시대 속에서 각 민족국가들은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한 나라의 영화가 저 나라의 영화로 옮겨갈 때의 그 모빌리티, 이동성 속에서 이 나라 속에서의 문화가 저 나라에 가서 기호가 되었을때 만일 그 기호만 가지고와서 이 나라에서 영화를 만든다면 그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영화의 방법을 통해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의 영화 문화를 서로 접합시킬 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 이 말이 복잡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타란티노의「킬빌」을 보셨습니다.「킬빌」의 청렵전에서의 대결장면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그건 헐리우드의 전통이 아닙니다. 타란티노는 홍콩무협영화와 쇼브라더즈영화사의 전통과 그리고 일본 60년대 스즈키 세이쥰의 사무라이 활극 장면을 무차별로 끌고 들어와 한 장면 안에서 성립시키고 있습니다. 자, 그 경우에 아이덴티티, 조금 전에 질문하셨었던 정체성, 그 문화적 정체성이 기호가 되었었을 때, 그 기호의 원래 주인이었었던 네쇼널시네마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이것이 사실은 바로 21세기로 들어온 영화의 가장 큰 화두인 것입니다.

정은임

네. 한 마디로 그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영화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같은데 우리가 헐리웃의 영화는 그 어떤 영화든지 다 이해를 할 수 있는 반면에 이제 유럽의 영화에 대해서 전혀 감을 못잡고 있는 것은 그들 자체가 유럽 통합 이후로 하나의 거대한 대륙으로써 그 안으로만 침잠하는 그들의 영화제작 혹은 그 심성도 문제겠지만 우리도, 그 바깥에 있는 우리도 그 영화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읽어내려는 그 노력, 서로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성일

8년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을 가장 쉽게 이야기드리자면 여러분들께서 오늘의 이야기를 다소 방만하게 생각하신다면 자, 저는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겠습니다. 영화학회에서 나온 표현이었습니다. 발제를 하던 분께서 이야기를 하다가 맨마지막에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얘길 했었습니다.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영화가 지난 10년동안 너무나 영화가 교활해지고 산만해졌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타르콥스키나 아니면 누벨바그 감독들이나 60년대 모던영화 감독들은 이제 이 교활한 영화 속에서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화가 이렇게 교활해지고 한편으로는 세계화 속에서 이렇게 산만해지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것과 소통하려면 어쩌면 더 정직해지거나 혹은 반대로 더 영악해져야 될 것입니다.

정은임

예. 더 정직해지거나 더 영악해져야되는 정말 어려운 길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데요. 오늘 정성일씨와의 이야길 마무리지으면서 음악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자, FM 씨네마떼끄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두번째 시간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성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