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임의 FM영화음악』 2004.01.28.본인인터뷰|시론

FM 씨네마떼끄 정성일편 -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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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

라디오를 들으시면서 여러분들은 주로 어떤 자세를 하고 계세요? 아마 매주 이 시간 한 달동안은 잔뜩 긴장하고 펜을 들고, 노트를 펼치고 그렇게 계시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셨죠? 문용훈씨가 '이렇게 난이도 높은 비평을 라디오 방송에서 접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습니다. 들어서 이해하기에는 어렵다 싶어서 요약정리 해가면서 들어야하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들어야 했으니까요', 하셨죠. 네, 아마 라디오 방송에서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분은 이 분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영화평론가 정성일씨 오늘 마지막으로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성일

안녕하세요.

정은임

네. 허은경씨는, 음. 청취자 은경씨는 '잠든 나의 영화 신경을 간지럽힌다. 과연 나는 진정한 방부제가 될 수 있을까, 영화의 방부제' 하면서 정성일씨와의 방송을, 어, 그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들었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오늘 마지막 시간이시죠? 한 달이 이렇게 빨리가나요?

정성일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것은 짧은 이별이며 또 이 시간에 출연자 중에서 누군가 펑크가 나면 항상 달려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정은임

고맙습니다. 펑크가 나길 바래야 되나요. 하하. 자, 오늘 마지막으로 어떤 이야기로 마무리 해주시겠어요?

정성일

오늘은 여러분들께 지난 주에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한국 영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우리가 질문할 것은 언제나 여기에서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영화란 결국 무엇인가.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한국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라는, 그러니까 한국 영화가 피와 살을 가진 개념으로 다루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입니다.

이를테면 70년대의 한국 영화는 언제나 열등한 대중문화의 상징이었었습니다. 오죽하면 저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한 국회의원께서 말씀하시기를 해방 이후 나빠진 것은 국회와 한국 영화 뿐이다. 라는 말까지 했었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왜 한국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 만큼 웅장하고 재미있게 만들지 못하는가 라는 대중들의 탄식과 그리고 지식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한국 영화는 왜 유럽 영화처럼 예술적이지 못한가 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80년대가 들어서자 불현듯 한국 영화는 왜 제3세계 영화와 합류하지 못하는가 라고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이를테면 이것은 페르난도 솔라나스와 옥타비오 게티노가 함께 쓴『제3영화를 위해서』에서 제1영화는 제국주의 헐리우드 영화, 제2영화는 아트하우스의 유럽 영화, 그리고 민중들을 위한 제3영화가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라고 얘기한 바로 그 문건이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한국 영화여 연대하라' 라는 그 슬로건이 외쳐졌습니다. 이것은 물론 80년대의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 혹은 막시즘의 어떤 정치적인 계절의 어떤 결과일 것입니다.

그것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인문사회과학담론의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이, 언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라고 질문할 때에 그 한국 사회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안고 있는 그 역사적 과정을 다시 복기하자라고 질문되어지는 바로 그 순간, 한국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국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배경이 되었다면, 지식의 배경이 되었다면 그 정치적 상황은 1988년 9월 추석에 개봉한「위험한 정사」를 기점으로 시작했었던 헐리우드 직배영화와의 싸움이 스크린쿼터 투쟁으로 점화하면서 한국 영화의 정체성을 질문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여기에 경제적 상황이 있습니다. 한국 영화에 기업들이 투자함으로서 이제까지는 거의 가내수공업이라고 불러야 될 그 조촐한 구멍가게식 운영과 그리고 블랙마켓에 가까운 그 시장에 기업의 산업자본 유입으로 영화 산업 전체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세가지가 한데 만나 '한국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은 잠시 멈췄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8년전에 이 프로그램을 들으셨던 많은 분들에게 한국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8년 전 프로그램을 들을 때 유난히 부족했다고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한국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새벽 3시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들 중에서 지겹다고 말하시는 분이 있으실 겁니다. 그래서 '내가 왜 새벽 3시에 이렇게 괴로워야 돼' 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과정 자체는 당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안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당신은 영화에서,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솜사탕 같은 이야기만 원하십니까. 영화도 결국은 피와 땀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 과정은 여러분들이 낮에 흘리는 소금만큼 그렇게 눈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팝콘을 들고 영화관의 입장 티켓을 살 때의 그 순간은 동시에 영화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자생존의 경쟁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여러분들께서는 꿈과 환상에 젖어들고 싶으시겠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당신의 꿈과 환상을 위해서 영화를 하는 우리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서 제가 지난 8년 동안 깨달은 것은 세상이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결국 당신 주머니 속의 지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고다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영화는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꿈꿔서는 안된다' 는 겁니다.

이 한국 영화가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이 마지막 방송을 끝냈을 때 그리고 IMF를 통과했을 때 한국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면재편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8년 전에 이 프로그램이 한국 영화 얘기할 때와 지금 한국 영화를 얘기하는 방식은 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물론 그 성공의 기준점에는「쉬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680만명이 들었고 이 영화는「타이타닉」의 기록을 깨트렸습니다. '야, 한국 영화 만세' 라고 이야기하시면 안됩니다.

이 680만명이라는 관객이 든 것은,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단지 한국 영화가 갑자기 잘 만들어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화의 배급 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 관객들을 영화관 안으로 끌어모으는 새로운 방식이 가능해진 겁니다. 여기에 새로이 도입된 전략적 용어가 블럭버스터인 겁니다. 물론 블럭버스터라는 말이 정확하게 맞는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블럭버스터란 말이 처음 도입된 것은 헐리우드에서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나고 올해 헐리우드에서 가장 성황하는 영화가 무엇인가 한번 여름 시즌을 기다려보자 했었을 때 유니버셜영화사는 작은 한 편의 신인 감독이 찍은 영화를 들고 배급 방식을 완전히 바꿔서 한번 개봉해보자 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이제까지 영화가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흥행수입 1억불이라는 블럭을 이 한 편의 영화가 버스터, 돌파해버렸습니다. 바로 이 영화가 27살 스티븐 스필버그의「죠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블럭버스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입니다.

이 개념을 도입해서 한국 영화에서 설명하자면 한국 영화의 블럭버스터라고 대접받을 수 있는 영화는 큰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아니라 전국 관객 300만명을 넘는 영화들이 이 용어에 적합할 것입니다. 블럭버스터를, 영화들이 만들어지면서 문제는 제 생각에, 문제는 기이한 현상이 두 가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자 이 문제는 여러분들의 호주머니 속의 지갑과 연관돼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일시적으로 영화 관객을 끌어모으지 못하면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홍보마케팅 비용이 갑자기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는, 산업에 종사하는 말에 의하면 26억 5천만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평균 마케팅비가 영화 한 편에 20억원이 따라붙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결국 45억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제로섬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국 관객 140명이 들 때부터 자기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140만명이요?) 네. 무조건 140명을 동원하지 않으면 그 외의 영화는 다, 이런 표현을 심야에 용서하십시오. 제작자들 표현으론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영화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소비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유통이 잉여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이해관계가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최대 개봉을 하는 겁니다. 가장 많은 영화관에서 개봉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작자가 가장 큰 돈을 버는 방법은 가장 많은 개봉을 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배급업자가 가장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빨리빨리 돈 많이 버는 영화를 개봉시켜야되는 거니까 최단개봉이 되는 겁니다. 최대개봉과 최단개봉이라는 이 기이한 개념이 결합하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 자 여러분들 올해 크리스마스 때 영화관에 가서 16개 영화관이 있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러 가셨습니다. 아무 영화나 봐야지 하고 가셨는데 16개관에서 몇 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습니까. 다섯편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 한가지 불만 더. 자, 그러면 내가 이번 주에 바쁘니까 다음 주에 보러가야지 하고 약간 예술적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보러가실 땐 어떤 상황이 벌어집니까. 다음 주에 가면 이미 (못 보죠)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스크린쿼터라는 문제는 단지, 이 문제는 사실 저희가 하루를 할애해서라도 토론을 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스크린쿼터는 단지 헐리우드 영화로부터 한국 영화 보호라는 단순한 차원의 메커니즘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결국 영화 문화의 다양성입니다. 이것이 블럭버스터 시대 한국 영화의 파티 뒤에 있는 제 생각에 그 어두운 그림자인 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제 생각에 매우 폭력적 상황입니다.

자, 여러분들께서는 올해 겨울「실미도」를 보고서는 정말 감동적이라는 말을 하셨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구 4700만명의 나라에서「실미도」는 곧 1000만명을 돌파한다고 그럽니다. 한 편의 영화를 1000만명이 본다는 것은 매우 끔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결론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조건은 여러분들 상상해 보십시오. 자, 인구 4700만에 1000만이 봤다는 얘기는 4.7명 중에 한 명이 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욕탕에가서 다섯명이 있으면 실미도 본 사람 그러면 누군가 한 명 손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의 로또 확률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 이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제한된 숫자의 극장에서 제한된 상영일 동안에 인구 4.7명 중에 같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끌어들일 때에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화 문화적 체험의 단일성이란 얼마나 한심한 것입니까.

정은임

그렇죠. 그것은 다른 말로 해서 그 영화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영화의 그 유통경로나 지갑을 쥔 사람들의 기획을 맡은 사람들이 얼마나 발빠르게 움직이고 다른 영화들을 철저하게 차단했는가 거기에 달려있는 거기 때문에 더 끔찍한 일이 될 것 같은데요. 자, 사실 지금 음악을 들을 시간이 넘어버렸어요. 저는 지금까지 한 달 동안, 한 달이라고 하지만 고작 네 번 뵜어요. 인제 네 번 뵈는 동안 이 제한된 시간 동안 이 많은 이야기를 하실려니 저는 정말 가만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음악은 들어야겠죠. 음악으로 쉽표를 찍구요 그 다음 얘기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임권택 감독의 영화죠.「축제」중에서 김수철이 음악을 맡았습니다. "꽃의 동화" 한번 들어봅니다.

"꽃의 동화" composed by 김수철

정은임

네. 임권택 감독의「축제」중에서 "꽃의 동화" 들어봤습니다. FM 씨네마떼끄 오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마지막 시간으로 한국 영화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시는데요. 좀 전에 지금 엄청나게 커진 한국 영화계, 그 현상과 그 내면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해주셨어요. 제작적인 측면, 산업적인 측면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이제 뭐 임권택 감독의 축제 영화음악을 들었으니까 이제 감독 이야기를 할 때도 되었죠?

정성일

제 생각에는 이 산업적 상황 속에서 결국 한국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지지할 것인가, 어떻게 지도를 그려야 될 것인가는 제가 네 번 출연 중에 맨 첫날 얘기해 드렸던 그대로 결국 영화에서 지지할 것은 예술가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 여기에서 그러니까 한국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어찌되었건 임권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권택이 소중한 것은 무엇보다도 제 생각에는 한국 영화란 결국 임권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프랑소와 트뤼포가 '프랑스 영화는 결국 장 르노와르와 로베르 브레송이다' 라고 이이기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혹은 고다르가 '독일 영화는 결국 프릿츠 랑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혹은 하스미 시게히코는 '일본 영화는 결국 오즈 야스지로이다' 혹은 '미국 영화란 결국 존 포드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들께 오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감독들이 이 나라의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히 사람마다 영화학자들마다 씨네필마다 자기의 취향에 따라서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임권택은 아주 느리게 자기의 영화를 전개시켜 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쫓아가면서 그리고 그가 아흔일곱번째 영화「춘향뎐」과 아흔여덟번째 영화「취화선」이라는 결론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는 결국 이럴 수 밖에 없었다는 그 자기 한계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에만 이 영화가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임권택을 이해하는 과정은 그가 만든 영화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러니까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여튼 한 인간이 일제강점하에 태어나서 해방전후 좌우익의 이데올로기에 온가족이 희생이 내면화되고 한국전쟁의 현장의 한복판을 온 몸으로 통과한 다음에 전후 한국사회의 냉전이데올로기 속에서 하여튼 연좌제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다가 80년 5월 광주와 그 정치의 계절을 지나쳐서 결국 21세기에 이르른 한국인의 그 세상에 대한 결론이 그 영화들이기 때문입니다.

정은임

그런데요, 혹시나 사람들이 한국 영화는 결국 임권택에 달한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뭐「취화선」이나「춘향뎐」이나 혹은「축제」나 그런 영화에서 보여지는 소위 말하는 그 전통한국문화라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냐 라고 탁 핏대를 올릴 때...

정성일

저는 거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임권택은 이미 77년도「족보」에서 이런 순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영화에서 위대한 순간은 항상 그 쇼트가 왜 거기 있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을 때, 그 쇼트에 필연성이, 그러니까 영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영토,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 자기가 그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유에서 나올 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저는「타이타닉」이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딱 한 쇼트 때문입니다. 그 영화에서 배가 엎어지고 온갖 난리가 벌어지고 그 사람들의 멜로드라마가 벌어지는 것은 제 관심이 아니었었습니다. 정말 이 영화가 제 마음을 움직인 딱 한 쇼트는 배가 기울고 온갖 사랑이 벌어지고 헤어져야 되냐 말아야 되느냐 죽냐 사느냐 스펙터클이 벌어지고 있는 이 2억불짜리 스펙터클 영화에서 느닷없이 카메라가 갑자기 딱 한 쇼트, 텅 빈 바다 위에 저 멀리 하늘에서 그 바다 위에 한 점 불빛처럼 보잘 것 없게 떠 있는 19세기 인간의 저 오만함을 비추는 저 단 한 쇼트 때문입니다. 그 순간, 그 타이타닉의 그 보잘것 없음, 그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을 저 우주적인 쇼트가 저는 제임스 카메론이「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대한 생각의 쇼트를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저는 거기 생각의 쇼트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없어도 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타이타닉」은 스펙터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족보」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일본인 다니가 창씨개명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 마을의 유지인 설진형 노인을 찾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집을 찾아온 다니를 보여주고 일반적인 영화라면 설진형 노인과의 만남을 보여주면 됩니다. 매우 간결하게 찍은 이 영화가 이 장면에 온 순간 갑자기 쇼트가 번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다니가 이 집에 찾아온 쇼트에서 설진형 노인을 만나는 쇼트로 건너뛰어들어가지 못합니다. 문을 두들기고, 찾아왔습니다 라는 얘기를 하고 그리고 그 설진형 노인의 방을 찾아가는 과정을 길게 보여주고 기다리는 쇼트가 이어지고 그 다음 설진형 노인을 만납니다. 왜 그렇게 찍었을까 질문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에게. 임권택 감독, 대답합니다. 그런 장면은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냥 붙이면 쇼트가 붙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나는 영 불편해지는 겁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인의 젊은 사람이 나이든 어른을 만나는 예절의 방식인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잉여의 쇼트, 혹은 그 불편함에 대한 판단, 임권택은 영화 속에서 한국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가 스며드는 쇼트와 씬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정말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혹은「길소뜸」에 정말 이상한 롱테이크가 있습니다. 한국 전쟁 때 헤어졌던 옛 여인을 만나고 남편이 돌아옵니다. 이 돌아온 남편에게서 직감적으로 옛 여인을 만나고 왔다는 것을 알아챈 부인이 '당신 그 여자 만나고 왔죠?' 라고 물어보자 차마 거짓말 못하는 남편이 '그렇소' 라고 대답할 때 그 남편은 카메라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텅 빈 화면 속에 '그렇소' 라는 소리만을 담습니다. 그 쇼트만 가지고 얘기하면 그건 정말 이상한 구도입니다. 그건 말이 안되는 구도인 겁니다. 그러나 임권택 감독, 대답합니다. '그걸 대답해야 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빤히 카메라가 들여본단 말이오. 그건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지'. 말하자면 거기서 보는 것은 한국인의 인간에 대한 예절인 것입니다.

결국 영화가 세상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영화에서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한국 영화에서 임권택이 소중한 것은 바로 그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물어보고 그것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드렸습니다. 허 샤오시엔 대답했습니다. '영화란 결국 제가 세상을 대하는 예의인 것입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대만 영화에 허 샤오시엔이 있다면 한국 영화에서 임권택이 바로 그것을 자기 영화에서 실천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권택의 영화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20세기를 살아낸 한국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은임

네. 그러니까 보통 흔히 임권택 감독이 국민 감독이라는 이상한 칭호로 불려지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한국 전통 문화를 나열하는 그 소재주의 때문에 그런게 아니냐고 사시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근데 분명히 그런 소위 한국적이라는 소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그 정신 때문에 가장 한국적인 감독이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주목하고 앞으로도 봐야 할 감독이라는 그런 말씀이셨어요. 자, 그렇다면 임권택 감독 외에 우리가 또 지금 주목해야 할 또 한국의 대표적인 감독이라고 하면 누가 있을까요.

정성일

임권택 감독이 한국 영화에서 그 예절을 추구하는 감독이라면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그 삶에 대해서 가장 무례한 감독은 제 생각에 장선우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장선우의 행보를 한편으로는 이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장선우는 동시대의 영화 감독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시대정신의 공기에 가장 예민한 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정말 그 바보같은 포스트 모더니즘이 수입되었을 때, 그래서 지식 수입 오퍼상들이 그게 마치 대단한 어떤 열쇠인 것처럼 끌어안았었을 때 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빈정거리면서 웃은 것은 장선우였었습니다. 그 영화는「경마장 가는 길」이었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로 장선우의 모든 영화는 결국「경마장 가는 길」의 변주이거나 반복에 지나지 않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한 가지 더, 더 걱정스러운 것은 장선우는 영화의 형식 자체에 대해서 이상한 허무주의에 사로잡힌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영화가 진행되지 않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저는 영화에서 장선우는 일종의 자해활극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그래서 결국 결론은 세 편의 재난을 맞이했다는 겁니다. 저는「나쁜 영화」와「거짓말」,「성냥팔이소녀의 재림」이 동일한 재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재난의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나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중간에 갑자기 자신이 하던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10대 아이들 현장에서 버티던 그 디지털 카메라는 갑자기 거리의 홈리스로 옮겨가면서 테마를 스스로 소재로 추락시켜 버립니다. 게다가 여기에 디지틀 영화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장선우가 영화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저는 이 대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오해는 사실은 많은 한국 영화감독들의 오해이기도 한데 영화는 아무리 즉흥적으로 만들어도 그것이 쇼트의 질서를 필연적으로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의미가 생겨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의 존재론입니다. 그러니까 즉흥 그 자체가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해야할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그러니까 도와 미 사이에 무슨 이데올로기가 있겠습니까.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입니다. 음악에서 마지막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를 격파시키려던 루카치는 마지막 순간에 좌절해 버렸습니다, 음악에서. 즉, 그 선율이 가능한 음악, 그 중에서도 재즈만이 그 즉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아무리 피하려해도 그 가장 기본의 단위가 이미지라는 재현이기 때문에 그 세상을 이미지가 포착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이미 세상에 대한 의미부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로, 그 자체로 세상의 총체성을 이미지가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는 언제나 제한된 그 자기의 불완전성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 어떤 의도가 담겼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 의도가 보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사이에서의 의미의 소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거짓말」로 가자 저는 거의 자멸극에 이르렀다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의미의 최소화와 싸우려고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옷을 벗었느니 말았느니 음모가 보이니 마니 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여관이라는 공간으로 갔었을 때 그것은 장선우의 신중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여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 영화는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미장센의 무력함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관을 가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여관은 일정한 시간 동안에 빌리는 남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 방의 미장센은 나의 의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오직 행동과 인물만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과 인물과 장소가 이미지에서는 언제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가 되면 결국 씬이 성립하는 것이고, 씬이 성립하면 씬과 씬의 연쇄적 기능에 의해서 의미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웃긴다고 생각하는 것은「거짓말」이 정치적 알레고리라고 이야기하는 비평적 담론들입니다. 사실「거짓말」은 정말 포르노를 찍은 겁니다. 중요한 것은 자, 포르노를 찍고 나서 저는 대답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겁니다. 이 영화를 찍고 나서 법원이 물어봤습니다. '당신은 왜 포르노를 찍었습니까' 잘못된 대답. 이것은 예술 영화이지 포르노가 아닙니다. 라고 얘기했을 때 그것은 법을 인정하는 겁니다. 법이 틀렸다고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맞습니다. '네. 포르노 맞습니다. 근데 왜 그게 문제가 되죠?' 자, 저는 포르노의, 또는「거짓말」의 이 정치적 논쟁에 논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장선우는 더 밀고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흔히 충무로에 있는 업계종사자들 말에 의하면 '성냥팔이소녀의 재난' 이라고 부르는「성냥팔이소녀의 재림」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비판들 중에 하나는 이 영화가 120억원이라는 재작비를 낭비한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저는 그게 별 관심이 되지 않습니다. 120억원을 썼건 1200억원을 썼건 그 영화를 보는 내가 즐거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영화가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저한텐.

영화를 보는 중간에 수없이 저는 이 영화가 영화를 만들면서 자꾸 영화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영화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자꾸 딴 영화가 되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의미의 벡터가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면 저는 이 영화의 미학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선우는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비겁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불현듯『금강경』의 구절과 장자의 성어를 뒤섞어서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그 무력함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이 모든 것에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력함도 미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에술의 변명이 아닙니다. 즉,「성소」에서 괴로운 것은 전 여기에 있습니다. 왜 있지도 않은 깨달음이 여기에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냐는 겁니다. 혹은 왕은 실제로 아무 것도 입지 않았는데 왕이 대단한 옷을 입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비평가들은 저는 자기 손에 정말 손을 얹어놓고 자기가 깨달았냐고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걸 깨달았다면 그 영화평론가는『금강경』과 장자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제 동료 중에 그걸 깨달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슬픈 것은, 정말 슬픈 것은 이것이 10대 영화의 흥분이라면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50대 영화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면 저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자, 안노 히데야키가「에반게리온」을 찍었습니다. 그 영화의 테마는 딱 한가지입니다.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세상에 대한 절망감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말 큰 실망입니다. 그러자 그 젊은 애니메이션 감독을 위해서 나이많은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모노노케 히메」를 찍었습니다.「모노노케 히메」의 테마는 딱 한가지입니다. ' 살아라'.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젊은 친구에게 나이많은 선배는 살아라 라고 하소연하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멋진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은임

칼침을 엄청나게 날리셨는데요,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정성일씨가 평가하시는 두 감독의 이야길 들었습니다. 지금 세상에 한국적으로 살아간다는 것, 혹은 한국인의 정신을 담아서 정말 세상에 대한 예의로서 영화를 찍는 또 한 명의 감독, 임권택 감독의 이야기와 그 정반대에 있는 가장 무례한 감독으로서의 장선우 감독을 말씀해주셨는데 즐거우셨죠, 여러분? 시원하셨으리라 믿고 음악을 들어봅니다.「성냥팔이소녀의 재림」중에서 들어보죠. 이병훈이 영화음악을 맡았는데요, "라이터 사세요"

"라이터 사세요" written by 이병훈

정은임

장선우 감독의「성냥팔이소녀의 재림」중에서 "라이터 사세요" 들어봤습니다. 자, FM 씨네마떼끄, 평론가 정성일씨와 함께 하고 있는데요, 자, 이젠 어떤 감독에게 칼침 혹은 찬사를 날릴지...

정성일

아. 세번째 시간은 찬사입니다. 제 생각에 지금 한국 영화에서 예술가는 두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홍상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김기덕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1996년 같은 해에 데뷔한 것은 제게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도착한 것입니다.

홍상수에게서 중요한 것은 제 생각에 결국 시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일상성이나 혹은 도시적 삶은 제가 보기에 그저 홍상수의 표면일 뿐입니다. 홍상수는 인간이 그 사건이라는 시간의 구조 안에 빠져들어서 결국 그 속에서 벌이는 아이러니 끝에 인간이 시간의 주인임을 자포자기해버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시간의 그 거의 모든 테마를 자기 영화 속에 끌어들이고 있는데「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있노라면 서로 다른 시간이 같은 장소에서 겹칠 때 어떻게 될 것인가 또는「강원도의 힘」에서는 두 개의 시간과 같은 장소, 다른 장소와 같은 시간을 겹쳐놓습니다. 또「오! 수정」에서는 같은 시간의 서로 다른 관점을 반복해 보입니다.「생활의 발견」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왜 같은 행위는 왜 반복될 수 밖에 없는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이 올해 5월달에 볼「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는 시간의 엇갈림의 순간, 그러니까 꿈이나 백일몽, 환상의 시간은 실제의 시간에 어떻게 침입하는가를 다룰 예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홍상수는 한국이라는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끈질기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말은 홍상수가 새로운 점은 이제까지 대부분의 한국 영화 감독들은 또는 동시대의 대부분의 영화 감독들은 한국이라는 영토, 그 장소의 고정점 속에서 질문해왔지만 오직 홍상수만이 시간이라는 구조 안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홍상수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그러니까 한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를 착시현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왜, 시간은 볼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홍상수 영화를 잘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홍상수의 트릭이자 홍상수의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상수가 이런 아이러니를 끌어들이고 있는 동안 김기덕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래도 되는가. 정말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가. 저는 김기덕 영화는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기덕은 이미 아홉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빠른 속도입니다. 이 영화 모두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단순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단순성이 일종의 연극성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이를테면 그 단순한 화면들 또는 그 단순한 화면이 그 무대에서 아주 서투르게 공연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꾸로 김기덕 영화에서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왜, 김기덕이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육신입니다. 그 육신이 문제입니다. 육신을 어떻게 해서든지 찢고 망가트리고 상처내고 피흘리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김기덕에게서 정말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섹스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그 육신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의 잘못이라는 테마는 결국 무엇입니까. 내가 태어난 것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김기덕이 매달리는 것은 죄의식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직 한국 영화에서 이제까지 수많은 영화 감독들이 있었지만 제 생각에 유일하게 김기덕만이 죄의식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죄란 결국 저질러질 수 밖에 없으며 그런데 그 죄가 혹시 환상과 육신 사이에 어떤 매듭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김기덕 영화를 보실 때 주의하실 점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반문하는 것과는 달리 여성들이 부서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가련해지는 것은 남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자기를 제발 짓밟아달라고 하소연하는 겁니다. 즉, 하여튼 김기덕 영화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다룰 수 없는 그 나쁜 의지가 있습니다. 그 나쁜 의지가 결국은 그 모든 김기덕 영화는 항상 자기를 부수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 과정을 통해서 죄의식으로부터 탈출하고 남자들은 죄의식 속으로 도망가는 겁니다. 즉 죄의식 안에만 있을 때 자기는 안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나쁜 남자」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여러분들께서는 이 모든게 갑자기 그 거리를 떠돌며 매춘하는 그 부부의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던져놓고 느닷없이 기독교 복음성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김기덕은 한국 영화에 종교적 테마를 끌어들이고 그 죄의식을 붙들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오직 김기덕만이 고해성사를 할 준비가 되어있는 감독인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김기덕이 그렇기 때문에 한국 영화에 매우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은임

네. 지금까지 네 명의 한국 감독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 가장 아버지 같은 분으로서의 그 임권택 감독 그리고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화제를 몰고다니는 감독으로서의 장선우 감독, 홍상수 감독, 김기덕 감독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밖에 우리가 지금 주목해봐야할 한국 감독들이 또 있겠죠?

정성일

아마도 여기까지 이야기하시면 반문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빠졌습니까. 이를테면「8월의 크리스마스」와「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혹은「올드보이」의 박찬욱, 미리 얘기하자면 아직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올드보이」는 올해 깐느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장화,홍련」의 김지운 그리고 마지막으로「살인의 추억」의 봉준호와 같은 감독들을 지지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 이들의 영화가 서로 차이가 있고 그 미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작은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 이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는 우리시대의 대중영화들입니다. 괴로운 것은 이 영화들이 예술 영화이거나 작가 영화인 척 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온전한 작품들에 대해서 온당한 대접을 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이 감독들에 대해서 폄하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영화들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다르가 한 말 중에 또 하나의 인용, '트뤼포는 우리들의 방패막이이다' 그러니까 트뤼포가, 프랑소와 트뤼포가 그렇게 대중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누벨바그가 고다르나 로메, 리베뜨, 혹은 알랭 레네나 크리스 마르께의 영화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저는 이들의 영화가 대중영화가 안고 있는 미덕인 통속성을 끌어안고 우리시대를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서 충분히 비평적 담론들이 고민하고 생각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대중들과 시대정신을 만나기 위해서 고민하지만 홍상수나 김기덕처럼 거의 모든 영화에 모든 쇼트가 자기 테마를 향해서 달려나가는 영화를 찍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 생활의 발견이나 혹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은 자기 테마를 안고 끝까지 달려가고 있는 동안 박찬욱의「올드보이」는 '우리시대의 금기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혹은 허진호는 '우리시대의 사랑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김지운은 혹은 '우리시대의 결국 두려움이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라는 것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중의 통속성에 대한 질문을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영화는 저는 한국사회에서 대중들과 어떻게 영화가 소통할 것인가라는 바로 그 자리에 질문이 던져져야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은임

예, 자, 지금까지 한국 영화의 현재의 지형과 함께 의미있는 감독들에 대해서 쭉 말씀을 하셨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그 길에 들어서실 정성일씨에게로 다시 질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지금 영화 작업하고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감독으로서의 데뷔 아니 뭐라고 해야될까요. 첫인사.

정성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은임

하하하. 그런데요. 돌안맞으실 자신이 있으세요? 이렇게 칼침날리고 돌던지시고 하시면서, 물론 그 안에 애정과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다들 가끔 아파도 기꺼이 그걸 맞겠지만...

정성일

제 결심에 대한 충무로 제작자 한 분의 표현입니다. 당신은 첫번째 영화는 투자를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니, 제가 그렇게 유명하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투자가 시작됐다는 말을 듣자마자 한국영화감독들이 모두 모여서 성금을 마련하여 당신을 단두대로 올려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얘기했었습니다. 저는 올라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정은임

예, 그런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이라도 들을 수 없을까요.

정성일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는 저의 이것이 오랜 믿음입니다.

정은임

지금까지 수없이 영화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아, 물론, 그러면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저희가.

정성일

물론 그것도 역시 제 의지가 아니라 산업 안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산업의 명령에 제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정은임

네. 그렇다면요, 그럼 기대만 하고 마음을 비우겠구요...

정성일

그러나 한가지 미리 얘기드릴 것은 정은임의 영화음악실 여러분들에게 희소식 하나는 제가 정은임씨를 캐미어로 출연섭외에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정은임

저, 아직,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기는 좀 그럴 것 같은데. 빨리 말을 돌려야 겠네요. 그러면요 한달간에 정말 굉장히 짧은 그 만남을 끝으로 하면서 저희 FM 영화음악에 청취자 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 드리고 싶은 말씀 있나요?

정성일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은 세가지 입니다. 첫번째 말은 '한국 영화를 지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지지해야 될 것은 좋은 영화이지 한국 영화이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것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정말 진심으로 하소연하건대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제 작은 결론 중의 하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지 마십시오'. 영화는 대부분이 쓰레기입니다. 좋은 영화는 정말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는 그 세상의 즐거움을 그 위대한 소설들을, 시를, 연극을, 미술을, 음악을 즐기시고 난 다음 시간이 남거든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고작 백년 밖에 안된 예술이기 때문에 그 예술이 이 위대한 수천년의 전통을 가진 예술들을 이긴다면 그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좋은 영화를 만난다면 그것을 진짜 즐기는 법. '두번 보시기 바랍니다'.

정은임

네. 자, 많은 청취자들에게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슴에 담아두시면 좋을 만한 마지막으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말씀이었어요. 자, 마지막으로 저희 청취자분이 올려주신 짧은 정성일론에 대한 이야길 해야될 것 같애요.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의 오현석씨. 지금까지 영화에 대해서 정성일씨가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저희 청취자가 정성일씨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좀 해주세요.

정성일

제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베르그송을 인용한 대목이었습니다. 인용하시면서 설탕과 물과 컵이 설탕물컵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이라는 시간적 경험이 중요한 것이니 바로 그 과정 안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그 입장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 저는 이 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설탕과 물과 컵이 하나로 모이는 것, 그러니까 영화와 관객과 세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지속이라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는 베르그송보단 마르크스가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설탕물컵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컵을 당신이 흔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설탕물컵이 상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던져 깨버려야 됩니다.

정은임

네. 자,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고 그 동안 정말 감사드리구요, 언젠가 출연자 펑크가 있거든 다시 뵙기를 바라구요. 아니 그것보다 더 희망하는 영화감독으로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영화와 함께. 고맙습니다.

정성일

8년만에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정은임씨도 정말 더 예뻐지셨습니다. 프로그램 더 좋아졌습니다. 이 시간을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저 자신이 전 너무 슬플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짧은 이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빠른 시간 내에 여러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만나도록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은임

네. 고맙습니다. 여러가지 이렇게 마지막으로 사탕발림을 많이 해주셨는데 제 화장은 조금 진해졌을지 모르지만 글쎄요, 방송은 더 좋아질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자, 오늘 마지막 곡 영화「나쁜 남자」중에서 Carola가 부르는 "Blott En Dag" 입니다. "오직 하루" 들으면서 오늘 인사드릴께요. 지금까지 프로듀서 임재윤, 저는 정은임이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