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쇼』 1989.07.인물|타인인터뷰

CINEMATOGRAPHIC 覺書

인●터●뷰●안●성●기

영화라는 세계의 무대 위에 선 배우는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만일 안성기라면 그건 진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철저한 승부의 시간은 바로 현장, 그 장소가 되는 셈이다.

연기의 이름으로

영혼의 표정을 짓는다

인터뷰●정성일/사진●김재영기자

안 성 기

영화배우. 1952년 1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미 5살의 나이에 아역배우로 영화에 데뷰하였다.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아역 배우로 모습을 보였고 그 중 김기영감독의 <10대들의 반항>(59)에서는 시카고영화제 아역상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그 후 <얄개전>(65)을 마지막으로 아역배우로서는 은막을 은퇴하였다.

이후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의 75년 2월 패망이후 공산화되면서 그 자신의 말처럼 '자신의 전공은 이제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졸업후 2년간을 쉬면서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김기감독의 <병사와 아가씨들>(77)을 계기로 다시 영화배우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재출발 선언은 대마초 사건 해금으로 돌아온 이장호감독의 재기작 <바람불어 좋은 날>(80)로 이루어졌다. 특히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계산된 연기와 철저한 사전 준비, 그리고 천부적 재능과 끊임없는 자기변신에의 노력은 수많은 영화제의 수상과 함께 국내 톱의 자리에 그를 올려 놓았다.

이후 임권택감독의 <만다라>(81)와 <안개마을>(82)을 거쳐 '같은' 세대의 배창호감독과 컴비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컴비는 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그 흥행성적은 매년 톱을 차지하였다. 특히 <고래사냥>(84)과 <깊고푸른밤>(85)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황진이>(86)의 흥행적 참패와 함께 <안녕하세요, 하나님>(87)과 이석기감독의 <성·리수일뎐>(87)에서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연기로 슬럼프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장선우감독의 <성공시대>(88)와 박광수감독의 <칠수와 만수>(88)로 건재함을 과시했으며, 그의 복귀를 영화계는 수많은 수상으로 따뜻하게 응원했다. 현재 정지영감독의 <남부군>(89)에 출연중이며, 장선우감독의 <붉은 방>을 준비중이다.

안성기에 의한 안성기

●바람불어 좋은 날 (이장호감독, 1980)

●만다라 (임권택감독, 1981)

●꼬방동네 사람들 (배창호감독, 1982)

●고래사냥 (배창호감독, 1984)

●우리 기쁜 젊은 날 (배창호감독, 1987)

영화 배우는 화면 속에 담겨진 거짓말이다. 그/그녀는 이미 그/그녀 자신이 아니며, 거기서 고백하는 이야기는 그저 그럴듯한 남의 말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배우는 화면 위에 선 위험한 인물이다.

만일 진정한 영화 배우라면 그러한 이유때문에 자기 자신을 배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배신은 진실된 용기와 분명한 신념만으로 가능한 연기자로서의 양심선언인 것이다.

영화 배우는 화면 위에서 두가지 함정과 싸워야 한다. 그 하나는 자기자신이 바로 영화속의 인물이 되어 앵무새처럼 변모하는 것이다. 자신과 인물 사이의 밀고 당김을 포기한 연기자란 그저 그럴듯한 거짓말의 전도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관객들이 바로 자기 자신과 동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을 공격하고 비판하며 거리 지어지도록 해서 영화속의 진실을 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성기는 스타가 되기를 거부한 진정한 연기자 중의 한명이다. 그의 연기, 그의 표졍, 그의 손짓에는 자신에게 지금 맡겨진 임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겸손함과 프로 근성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걸 이름지어 영화의 앙티 나르시즘이 주는 감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연기자의 부재에 관한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사실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자가 진실 위에 설만한 용기가 없다는 비극적 결론이다. 그러기에 안성기의 솔직함과 철저한 승부근성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정말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스타'가 아니라 '연기자'인 것이다.

아역시절 부터 연기생활을 했다면 이제는 영화감독을 꿈꿀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떻습니까?

안성기- 성격적으로 나는 리더보다는 도와주는 쪽입니다. 그래서 리더 쉽이 중요한 연출 보다는 연구하고 생각하며 디테일하게 창조해나가는 연기자로서의 길을 택한 점에서는 후회가 없습니다.

연기자로서 <바람불어 좋은 날>은 특히 기념비적인 영화로 기억될 텐데요.

안성기- 나 자신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 준비기간도 대단히 길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연기자로서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교훈이라뇨? 이를테면 연기자로서 영화에 대해서 갖게 되는 일종의 수련같은 의미입니까?

안성기- 그런 셈이죠. 영화가 기획되고 있는 동안에 연기자는 수동적이 됩니다. 그러다가 현장에 와서 능동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이가 자기 연구의 시간이죠. 시나리오를 받아서 1차적으로 하는 작업은 외모입니다. 영화는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상과 머리스타일을 중요시 여기며 연구합니다. 그러면서 시나리오에 메모를 하고 자신이 맡은 인물에 집착하면서 디테일한 감정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영화와의 싸움은 시나리오를 받으면서 시작하는 셈이군요.

안성기- 그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 경우는 하루종일 영화생각을 합니다. 우연히 떠오르는 좋은 아이디어도 그런 습관 덕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게 즐거움을 주는 시간입니다. 영화의 즐거움이라고나 부를까요. 사실 연기자에게서 가장 처절한 곳은 바로 촬영 현장입니다. 레디 고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은 연기자에게 '영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장호감독과의 <바람불어 좋은 날>과 <꼬방동네 사람들> 이후에는 배창호감독과 거의 컴비를 이루어 작업을 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안성기- 이장호감독이 말썽장이 막내형같은 친근감이 있다면 배창호감독은 같은 나이라서 친구같이 편안함이 있습니다. 서로 작품을 해석하는 이해가 같고, 여러 면에서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아요. 물론 거기서 오는 안일함도 경계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컴비로 작업한 영화 중에는 베스트도 있지만 최악(!)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고래사냥 II>가 그 예인데요.

안성기- 사실 그 작품에 대해서는 배창호감독이나 저나 모두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관객을 지나치게 내려다 본 잘못을 저질렀어요.

아마도 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흥미있는 작품 중의 하나는 <황진이>일 것입니다. 흥행은 재난을 맞았지만, 당신의 연기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안성기- 내가 변했다기보다는 배창호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변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철저하게 계산된 연출로 일관하면서 아무리 작은 소도구도 철저하게 지시해서 연출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배창호감독은 내게 느낌 그대로의 연기를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하고 싶은대로 하는 연기를 바랬습니다. 예를 들어 컵을 드는 장면에서도 어느 순간에 들기 보다는 연기 도중에 느낌이 컵에 가 닿으면 집어 들라고 연출을 했습니다. 그러나 연기자의 감정적 흐름과 관객의 시각적 흐름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어서 아직도 이 문제는 내게 숙제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커트 수가 많은 영화와 장시간 촬영(이른바 롱 테이크) 영화 중 어느 쪽의 연기를 선호하는 편 입니까?

안성기- 글쎄요. 꼭 어느 쪽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군요. 다만 장시간 촬영의 경우 기술적인 처리대신 전적으로 실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커트가 많은 영화가 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배역을 맡으면서 가장 하기 싫은 연기는 어떤 것입니까? (웃음)

안성기- 연기자로서 할 수 없는 연기란 말이 안되죠. 다만 추운 겨울날의 연기와 베드 신은 싫어하는 편입니다(웃음).

지금까지 많은 상대역의 여배우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호흡이 맞는 연기자라면?

안성기-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겨울 나그네>에서의 이미숙씨입니다. 감정의 폭도 넓고 모나지 않은 그녀의 연기를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젊은 감독들과 많이 작업하면서 스스로도 자기변신을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안성기- 사실은 같은 세대의 감독들과 작업할 때에 비하면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새로운 감독들이 새로운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의 인물의 감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만일 의견이 정반대되거나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안성기- 그 경우에는 감독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결국 영화 전체를 컨트롤해야할 사람은 감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역할을 해왔는데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인물상이 있습니까?

안성기- 오히려 좋은 시나리오가 우선이겠죠. 다만 내게 사극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게 되었습니다. 말투도 틀려야하고 분장도 많아야 하는데 연기할 때마다 불편함을 번번이 느낍니다(웃음).

이제 돌이켜 보건데 스타보다는 연기자로서 최선을 다한 10년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안성기- 대중은 냉정하고 자기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기는 허망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늘 대중은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인기가 떨어진다면 그건 자신이 못쫓아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묻는다면 인기나 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변모에서는 어떤 작품이 선택될까요?

안성기- 그보다는 현장에서의 최선이 더 중요한 약속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좋은 작품에 기분좋게 출연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바라는 소망의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