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물』 1994.01.작품

영화감상/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사랑은 운명인가


헐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딱 두 단어로 요약된다. 달콤함과 해피 엔딩이다. 세상이란 그렇게 골치아픈 것이 아니며, 심지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행복할 수도 있다고 관객을 부추기고 선동한다. 그중에서도 헐리우드 영화의 그 놀랄만한 낙천주의 전략을 90년대 스타일로 새롭게 포장해낸 영화가 바로 로라 애프런 감독의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이다.

우선 이 영화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스타일과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게 어딜까? 바로 다름아닌 로브 라이너 감독에 맥 라이언과 빌리 크리스탈이 등장하여 온갖 우여곡절 끝에 20년만에 결혼하는 ‘별난’ 커플 이야기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그리고 그 유사함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의 감독이자 시나리오를 쓴 로라 애프런이 다름아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 원작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보다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그리고 집필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최고 걸작(?)을 썼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로라 애프런은 곧 좌절을 겪었다. 우선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심각한 주제만을 줄곧 다루어왔기 때문에 헐리우드의 제작들에게는 기피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중에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핵 누출사건으로 여성운동가로 변신한 생존인물의 삶과 의문의 죽음을 다룬 ‘실크 우드’(이 영화는 83년 마이크 니콜즈 감독이 연출했고, 주연배우인 메릴 스트립은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가 유명하다. 그런 그녀가 멜로 드라마를 쓰자 헐리우드 제작자들은 그건 그녀의 전공분야가 아니라며 다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도대체 그 내용이 너무 ‘황당무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시나리오를 완성한 87년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SFX 액션활극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로라 애프런은 그 어떤 제작자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로라 애프런은 이를 악물고 또 한편의 시나리오를 써서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로브 라이너 감독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영화화를 제의했다. 로브 라이너 감독은 SFX 특수촬영영화들을 유난히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바로 이런 스타일의 영화야말로 대세를 뒤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무릎을 쳤다. 그러나 로라 애프런은 그에게 단서를 달았다. 만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성공한다면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의 영화화를 주선할 것이라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고민하던 로브 라이너 감독은 결국 조건을 수락했고, 영화는 그 당시 모든 흥행관계자들의 예상을 깨고 무려 1억불을 돌파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제는 로브 라이너 감독이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는 기꺼이 평소 잘 알던 콜롬비아 영화사에 그 스스로 보증을 섰고, 심지어 그녀에게 감독 메가폰도 직접 쥐라고 권유했다. 로라 애프런에게는 이 영화가 그녀의 두 번째 연출작품이 된 셈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모든 사람들이 축제에 들떠 있다. 신문사 여기자 애니(맥 라이언)는 그날 결혼식을 앞두고 약혼자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우연히 라디오를 켜자 거기서 심야방송 상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화를 걸면 고민거리를 상담해주는 그런 프로였다.

그런데 이 프로에 여덟살난 남자 아이가 전화를 한다. 자기는 1년 전에 엄마를 암으로 잃었고, 그래서 아버지인 샘(톰 행크스)이 너무너무 불쌍하다고 덧붙인다. 만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으면 아버지에게 새 엄마를 선물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프로의 진행자는 전화로 톰을 불러내서 그 구구한 사연을 듣고, 톰이 아내 생각에 사실은 요즘도 잠 못이룬다는 말을 듣자 저런, 쯧쯧 하며 그에게 도시 이름을 붙여서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애틀로부터 정반대의 지역인 뉴욕에 뚝 떨어져서 고속도로를 달려가며 이 방송을 듣던 애니는 불현듯 이상한 예감을 받는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그 이가 바로 이 남자는 아닐까라는.

헐리우드의 제작자들이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만큼 황당무계한 이 이야기를 로라 애프런 감독은 정말 시침 뚝 떼고 아주 그럴듯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해서 성 발렌타인 데이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운명적인 키스를 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는 이 이야기를 마치 동화처럼 달콤하게 그려낸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로라 애프런 감독은 자기 시나리오가 말 그대로 억지(?)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뒤집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로라 애프런은 그 뻔한 결과를 놓고 관객들과 경쟁을 벌일 생각은 깨끗이 단념한다. 그 대신 해피 엔딩을 향해 달려 가면서 이제는 사라진 올드 패션 러브 스토리를 차례로 끼워 넣는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 나타나는 주인공들과 그 친구들은 마치 먼 과거에 있었던 좋은 추억 속의 앨범 사진들처럼 보인다. 그녀가 여기서 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로맨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걸 통해서 관객들이 행복하고 좋았던 과거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녀는 내기에서 성공한 것이며, 헐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이 영화가 4개월 만에 올린 1억 3천만불의 흥행수익을 보면 또 다른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저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