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물』 1994.05.작품

영화감상/ M. 버터플라이

오리엔탈리즘, 그 뒤틀린 환상


우선 상상을 해보자. 당신이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실은 내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고 고백한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펄펄 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M. 버터플라이>는 실화(?)이다.

우선 이 영화제목은 <마담 버터플라이>이면서 또한 <무슈 버터플라이>이기도 하다. 시대 배경은 1964년 베이징. 프랑스 외교관 르네 갈리마르(제르미 아이언스)는 어느 날 우연히 베이징 오페라 여가수가 프리마돈나로 나오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을 보고 그만 한눈에 빠져들고 만다. 그는 여가수 쏭릴린(존론)을 찾아가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 만나지만 문화혁명과 함께 임신한 쏭릴린은 귀향하고 르네는 스캔들로 본국으로 송환된다.

그리고 1968년 파리. 이제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르네를 쏭릴린이 찾아온다. 그녀는 아이를 공산당이 기르고 있으며, 아이를 위해서 국가기밀문서가 필요하다고 하소연한다. 르네는 기꺼이 그 일을 떠맡는다.

1972년 르네는 국가기밀 누설로 체포되어 법정에 선다. 그리고 거기서 쏭릴린이 스파이이며, 여장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쏭릴린은 중국으로 돌아가고, 르네는 형무소에서 오페라 ‘나비 부인’을 연기하며 마치 그 스스로 주인공 게이샤가 된 것처럼 분장하고 자살한다.

이 이야기는 1976년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외교관 베르나르 부르지코와 베이징 오페라가수 쉬 페이푸 사이의 간첩사건을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이 1988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동명의 희곡을 영화화 시킨 것이다. 영화와 연극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연극은 시종일관 여장남자에 의해서 진행되다가 마지막 순간 모두 옷을 벗고 관객 앞에 정면으로 서서 기존의 남자와 여자에 관한 편견을 고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영화는 좀더 미묘하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그저 ‘기이한’ 실화를 모델로 동성연애에 관한 논쟁을 제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경계에 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동양과 서구의 관계에 관한 영화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비 부인’의 계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맨 처음 이 이야기는 19세기말 일본에 선교를 하기 위해 건너간 미국인 여선교사가 일본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미국잡지 ‘센츄리’의 기자에게 전해주면서 시작한다. 우선 이 사건을 서구는 본 적이 없으며, 더구나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자의 입장으로 다소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이야기를 잡지기사가 르포 소설로 1897년에 발표하였다.

이 소설을 읽고 미국인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감동하여 1900년 희곡으로 발표하여 무대에 올렸다. 데이비드 벨라스코는 일본에 가본 적이 없으며, 일본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1900년은 아직 미국에서 일본에 관한 자료가 거의 발표되지 않은 시점이다. 즉 희곡 ‘나비 부인’은 미국인에 의하여 각색된 일본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무대로 올린 것이 이탈리아에 수입되어 1903년 작곡가 지아코모 푸치니가 보고 감동하여 2막 2장의 오페라로 발표하였다. 일본 게이샤의 이야기는 이제 미국을 경유하여 일본식으로 개작되어 소개된 것이다. 말하자면 오페라 ‘나비 부인’은 서구가 동양을 어떻게 각색하여 자기의 타자(他者)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문화 내부로 흡수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르네는 이 과정을 그대로 따른다. 그는 쏭릴린을 만나서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쏭릴린이 아니다. 그가 오페라 ‘나비 부인’을 보고 감동받은 그 이야기에 맞추어 각색된 주인공의 이미지를 그대로 뒤집어 씌운 르네의 환상 속의 쏭릴린이다. 그런 의미에서 쏭릴린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존재이다. 왜냐하면 쏭릴린은 그의 환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중국 공산당의 간첩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능동적으로 환상을 만들어내고, 가짜 쏭릴린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가면을 쓰고 만나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사건은 문화혁명으로 시작해서 1968년 5월 파리혁명을 경유한다. 모택동에 의해서 제안된 중국 문화혁명은 권력 스스로가 권력을 두들겨 부수라고 제안한 혁명이다. 홍위병들은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고, 권력은 이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혁명은 서구에 커다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혹시 68년 5월 혁명은 서구가 동양을 모조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상상적’ 혁명은 아니었을까? 혁명의 시간은 지나가고, 르네의 오해는 그와 줄기차게 평행하여 달려간다.

이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오해가 아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서구가 자신을 만들어온 방법이다. 서구는 동양을 자신들이 상상하고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동양주의라고 번역할 수 밖에 없는 이 기이한 이데올로기)의 정체이다. 구체적인 대상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을 잘못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심취한다. 이 나르시시즘은 더욱 위험하게도 대상을 이제 자기의 상상에 맞추어서 억지로 뜯어고치는 단계에로까지 밀고 나아간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며 침략이다.

크로넨버그 감독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환상이란 여자에 대한 남자의 환상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여자를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여기서 억압과 착취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차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그 두 가지는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서구와 남자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크로넨버그 감독의 대답은 단순명쾌하지만 동시에 냉정하다. 여기엔 죽음 이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없다. 왜? 자신의 타자 없이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지배와 착취는 대상이 사라지면 함께 소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