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 1998.02.시론|추천리스트

시네마스포팅 1998

라스 폰 트리에의 심야 영화 상영 방식으로; 자, 이제 당신은 잠들 것이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열을 세면 당신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 세상까지 가는 길은 완전히 길을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할 것. 하지만 거기로 가는 길마다 표지판이 있을 것이다. 1998년이라는 꿈 속에서(엘름 거리의 나이트 메어?) 만나는 귀신들은 여겨저기 출몰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결국에는 잠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는 잠자리를 잘못 택하면 변기통에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같은 고개길을 계속 오르면서 제발 자살하게 도와달라고 하소연하는 사십대 남자를 만날지도 모른다. 이미 낮에 만난 자들이 꿈 속에서 계속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첫 번째 수를 세어 보자. 열. 그러면 이미 보았을지도 모르는 뿌연 그림들이 여기저기 출몰한다. 이미 홍대 앞 카페에서 헤드 뱅잉을 하다 말고 보았거나, 대학 영화 서클에서 '후진' 불법 복사 테이프로 본 왕가위의 '춘광사설/해피 투게더'가 떠오를 것이다. 당신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장국영과 양조위가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싸우는 장면과 그리워하는 장면이 무수히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 사이에 접혀져 있는 감정들에는 저 멀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홍콩에까지 단숨에 접어 하나로 만드는 예정조화의 글로벌/로컬의 멜로 드라마가 담긴다. 이 뒤틀리고 구부러진 외부에로의 선은 왕가위를 허먼 멜빌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것은 지도의 영화이다.

그 두 번째 숫자, 아홉. 자동차의 차가운 금속성의 본네트 표면 위에 금발의 젊은 여자가 젖꼭지를 문지르면서 시작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는 극한의 사유를 보여 준다. 육체는 점점 더 기계가 되어가고, 기계는 속도를 거기에 더하고, 속도는 섹스의 체험으로 전이하기 시작한다. 이 정신분열증의 산책은 미로에로 접어든다. 이것은 비유로서 그려진 영화가 아니다. 부러진 다리를 떠받치는 철제 받침에 혀를 대고 애무하면서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것은 살과 기계, 피부와 금속, 항문과 기어변속, 창자와 엔진, 눈과 백미러, 성기와 계기판이 서로 뒤섞이는 것이다. 그래서 차이를 지워 버리면서 만들어지는 시뮬라크라들이 동일성의 인과율에 놓일 때 자아는 비대해지는 생산수단의 기계군과 접합되어 가게 될 것이다. 참고서적: 카프카의 변신.

그 세번째 숫자. 여덟.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점점 더 우리에게 타르코프스키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호기심은 사라졌고, 변덕스러운 '편수 채우기' 영화광들은 이미 떠나가 버린 지 오래이다. (이들에게 추천도서: 미국에도 이런 친구들이 많은 모양인데 짐 호버만은 [펄프 영화들: 타란티노 앞에서 자신있게 자랑할 수 있는 영화 2001편]이라는 책을 새로 냈다. 꼭 구입해서 형광펜 치면서 보시면 올 한해 '영퀴방' 우승은 따놓은 당상) 그러나 아직 우리는 키아로스타미의 진짜 걸작을 보지 못했다. '클로우즈 업'은 가짜영화 감독의 사기 사건을 놓고 가짜와 진짜 사이의 경계를 오가면서 사건과 실패 사이의 공통분모를 통해 마음에 이르고 있다.

네 번째 숫자, 일곱. 후 샤오시엔의 영화는 '비정성시' 이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후 샤오시엔은 이제 너무나 달라져서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의 '남국재견 (再見, 南國再見)'은 전혀 다른 구도 속에서 결여에 대해 묻고 있다. 그는 의지가 선한 관계들로부터 벗어날 때 왜 사회의 모순과 마주칠 수 밖에 없는가를 폭력적으로 다른다. 기후와 토지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후 샤오시엔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서 점점 더 속도에로 말려든다. 그것은 동시에 대만의 모더니티에 대한 담론(들)에 관해 다른 위치로부터 사유하려는 그의 위상학이라 불리울 만한 미학적 위치 이동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섯 번째 숫자, 여섯. 이르노 데스플라생의 '나는 어떻게 싸우는가, 또는 나의 성생활'은 굴곡에 관한 영화이다. 굴절과 회귀, 저항과 방향전환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국지화된 지점들을 익명의 전략이라고 할 다이어그램들이 감정의 유클리트 기하학에 따라 사람들과 사람 사이에 세워 놓는다. 그 거리는 아무리 줄이려 해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안전한 형태로 옮겨 간다. 지식인들의 사회를 프루스트처럼(또는 보마르세?) 따라가는 데스플라생은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더 이상 환원불가능한 미시적인 구도를 만들어 낸다.

여섯 번째 숫자, 다섯. 켄 로치에 관한 우리들의 무관심은 이상할 정도이다. (아니면, 하나도 안 이상하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지의 영화를 구하는 시네마데끄들 조차 켄 로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아마도 지구상에 남아있는 거의 마지막 좌파 영화감독이고 불리울만 한 켄 로치의 '케스'를 보고 싶어하는 의지가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직도 한국에 노동정당이 왜 없는가를 보여 주는 그 한가지 증후일 것이다.

일곱 번째 숫자, 넷. 쿠엔틴 타란티노의 세 번째 영화는 무려 4년이나 기다렸다. 엘모어 레너드의 재미 하나 없는 모험 소설(타란티노는 무지 재미있다고 하지만)을 영화로 옮긴 '재키 브라운'은 사십대 흑인 스튜어디스의 모험 활극이다. 소문, 이야기는 일직선이고('펄프 픽션'의 분산과 단층의 탈구된 이야기 구조, 또는 '저수지의 개들'의 절반만의 이야기), 말은 더욱 많아졌으며(그 해 가장 두꺼웠던 시나리오 '펄프 픽션'), 사운드트랙은 여전히 기가 막히고(50년대와 70년대 로큰롤 광, 또는 60년대와 80년대 록의 혐오자, 그리고 스스로 90년대 음악은 시시해서 못 들어주겠다는- 얼터너티브 록 지향의 비전향 장기수), 액션은 부족하며(그런데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에도 액션 명장면은 없다. 말하자면 타란티노는 오우삼이 아니다), 팜 그리어는 존 트라볼타처럼 보인다(설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또 다른 '펄프 픽션'이 될까, 아니면 그의 첫 실패작이 될까?

여덟 번째 숫자, 셋. 올해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산타 할아버지처럼 스탠리 큐브릭이 15년만의 새로운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가져온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주연인 이 영화의 내용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풀 메틀 자켓'이후 스탠리 큐브릭의 그 기나긴 침묵의 이유가 궁금하다. 그의 동료들 거의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지금 언제나 발표한 영화 그 자체가 영화에 관한 하나의 시청각적인 단절이 되어온 단면들의 입방체로서 구성된 테크놀로지의 자아는 지금- 여기 온통 단층들로 이어진 이미지들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홉 번째 숫자, 둘. 매우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한국 영화들 중에는 '절망적인 기분에 잠길만큼' 만나보고 싶은 영화는 없다. 그저 모두 거기서 거기까지다. 아마도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영화는 지금 완전히 자기의 길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미아와도 같은 어리둥절함은 우리들에게 예술이 가르쳐 주어야 할 좌표를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거기서 빚어지는 현실에 대한 눈멀기는 부정을 통해 더 나쁜 부정에로 이끌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긍정에 대한 부정은 또 하나의 사유이지만, 부정에 대한 부정은 허무이기 때문이다. 존재에 관한 구도를 잃고 장르와(또는) 미학에 사로잡힌 영화는 결코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자기를 벗어나 다른 것에 홀린 상태인데 (동일자로서의 타자의 시뮬라크라), 그것으로부터 돌아오기 위해서는 (긍정에의) 의지 (구도의 재배치)를 다시 배워야 한다.

열 번째 숫자, 하나. 그리고 올해부터 우리는 일본 영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일본 영화는? (에바? 모노노케? 사무라이 활극? 여고생 포르노? 오즈 영화? 비트 다케시? 아니면 이와이 슈운지? 등등.) 그건 아무래도 좋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일본 영화가 우리들의 영화에 대한 공감각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서 이미 우리들이 설정해 놓은 경계를 (어떻게) 다시 배치하게 만들고 (무엇으로) 우리들의 사유를 방향 바꾸게 하고 (더 나아가) 생성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아있다. 아직 대답은 알지 못하고, 이미 밤은 깊어졌다. 우리들은 길 잃지 않을 표지판들을 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