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 1999.06.작품|시론

어느 휴양도시에서 도착한 편지 - 깐느로 간 한국 단편영화 네 편

어찌되었건 올해 깐느에는 네 편의 (남한 단편) 영화가 초대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많은 제도권 영화감독들이 깐느 영화제에 가고 싶어하는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예상을 벗어나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네 명의 영화감독들의 작품을 불렀다. 제52회 깐느 영화제에 초대된 영화는 김대현 감독의 '영영(永永)', 김성숙 감독의 '동시(同時)에', 이인균 감독의 '집행', 그리고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다.

우선 깐느 증후군에 관하여:

왜 그렇게 많은 (우리나라의) 영화감독들은 (베니스나 베를린 영화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깐느 영화제에 가고 싶어할까? 우리나라는 불어권이 아니며, (거리에서 길을 물어보는 프랑스 인에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인은 몇 명이나 될까?) 아프리카나 베트남처럼 프랑스 식민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이례적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매년 베를린이나 베니스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 기자는 채 10명이 넘지 않는데 깐느에는 100명도 넘는 기자가 몰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그 중에서 불어로 인터뷰할 수 있는 기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깐느 영화제는 정말로 세상의 영화제 중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일까?

이상한 대답:

깐느가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효과적인 마켓인 것만은 사실이다. 깐느에서 상을 받으면 다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보다 훨씬 더 유럽 아트 하우스에 팔릴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얻는다. 그러나 이 말은 더 많은 예술성을 보장받는다는 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깐느 영화제에 그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이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우 미안하지만 그 대답은 매우 속물적인 것이다. 서방세계의 영화사 속에 편입되고 싶은 (서구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 세계 시민주의의 재판이며, 동시에 외세를 등에 업고 자국에서의 평가를 (더욱 강고히 하거나 그 반대로 비판의 견해를 '촌스러운' 지역주의로 폄하하려는 의도가 포함된 채) 바깥의 평가와 맞바꿔치려는 것이다. 게다가 더 위험하게도 그 밑바닥에는 불신이 깊숙이 깔려있다. 그것은 남의 눈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눈도 믿지 못하는 회의주의이다. 자기의 예술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평가는 의미없는 것이다. 또는 자기 예술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겸손함으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깐느 영화제는 과학과 규칙으로 정확하게 서로의 등수를 가리는) 올림픽이 아니며, 더 나아가 전적으로 공정한 경쟁을 벌이는 수험장은 더더욱 아니다. 그건 매년 서방세계 아트 하우스에 유통될 수 있는 영화들을 찾아내기 위한 시장 개념의 축제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또는 그 스스로 회의에 찬) 자신에 대한 대답을 바깥에서 찾으려는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건 그 자신에 대한 반성의 사유 없이 이어지는 명문대 유학과 아무 것도 다를 바 없다. 또는 그 방식의 (거의 도미노 이론에 가까운) 연장이거나 전염병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그러나 제도권 영화들과 달리 이 네 편의 단편영화는 깐느를 목표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그 자신들도 깐느 영화제에 가게 될 것이라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서로 거의 교류하지 않았으며,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서 자기의 영화를 만들었다.

김대현 감독의 '영영'은 죽은 아들을 기억하여 염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상영시간 8분 동안)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으며, 매우 조용하게 다루어진 이미지들 안에서 영화는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아들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아들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 화면 초점 바깥으로 나가 있어서 마치 지워져가는 기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것을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멈추어 보는 것뿐이다. 아들이 죽는 순간 어머니의 시간은 끝난 것이다. 김성숙 감독의 '동시에'는 청계천에 관한 시선이다. 한 남자는 공장에 희망을 갖고 들어가지만 손가락을 잘리고 여기저기 흘러 청계천에서 복권을 파는 자리까지 밀려온다. 한 소년은 포르노 불법 비디오 테이프를 판다. 매일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 두 사람은 이따금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동성애에 대해서 매우 암시적이긴 하지만) 함께 잠자지를 갖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 단속이 들이닥치고 소년 대신 남자가 잡혀간다. 남은 소년은 남자의 방에 있던 돈과 통장을 털어서 그 거리를 떠난다. 이것은 밑바닥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배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90년대 방식의 리얼리즘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에 관한 무한정한 신뢰로 이루어진 80년대로부터 떠나온 그 실망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이제 배신과 속임수가 넘쳐나는 술수와 위기의 순간들뿐이다. 이 무자비한 세계를 김성숙은 실망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 여기에는 일말의 희망도 없다. 이인균 감독의 '집행'은 제목 그대로 사형집행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 젊은 신부님은 나이 든 신부가 자리를 비운 날 한 사형수로부터 임조의 순간 고해성사를 부탁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경찰들과 함께 집행현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신부님은 사형수가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그래서 신부님은 혹시나 이 사형수가 미성년자일지 모른다고 검사에게 이의를 제기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을 틀림없으니 어서 마지막 미사를 드리라는 대답뿐이다. 신부님은 소년에게 말한다. "나에게 말해보렴. 나는 너를 돕고 싶구나" 그러자 어린 사형수는 대답한다.

"신부님, 신념을 가지십시오" 서로 뒤바뀌어버린 이 아이러니한 대화가 끝나고 사형은 용서 없이 집행된다. 이 안에서 그려지는 그 모든 의문은 신부님을 앞에 두고 신학적 질문을 던지면서 그 위에서 존재론적 의문을 표현하는 그 모순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대립의 구도이다. 송일곤 감독의 '소풍'은 아름답지만 비통하다. 실직한 가장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동반자살 여행을 떠난다. 아버지가 세워진 계획을 따라가는 동안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볼 아이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들을 남겨주려고 한다. 그 아이가 보는 마지막 세상처럼 송일곤은 시선을 던지고 싶어한다. 그런 다음에 다시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등지고 떠나야 한단 말인가?

이 네 편의 영화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더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무겁고 우울하다. 그것은 이 젊은 시네아스트들이 세상에 대해서 던지는 어두운 시선이다. 어쩌면 이 영화 감독들은 세상에 대해서 우리들이 보는 시선이 점점 더 침침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의 영화는 때로 초점 바깥으로 인물이 지워지거나('영영'), 대부분의 장면의 초점거리가 짧거나('동시에'와 '소풍'), 또는 등장인물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한다('집행'), 그것은 이들이 바라보는 우리들의 동시대성의 시대정신이다. 그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세상을 다시 헤쳐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합의라도 한 것처럼 우리에게 그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무책임한 태도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그들이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자리에 있기 떄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단편영화만큼이나)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미약함을 통감한다. 또 하나는 미루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미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그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가 아직 예술의 반성적 사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 안에서 그들 자신의 진정성을 찾는 데에는 이르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무엇일까? 이것은 매우 신중한 방법으로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또는 그 대답에 대한 요구가 너무 서툴거나 지나치게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대답을 찾을 때까지, 그리고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서태지가 그 대답을 찾지 못하도록 질문이 남는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서태지가 그 대답을 찾지 못하도록 괴롭혀서 기어이 내쫓은 잔혹무도한 왕따 사회라는 사실을 증명한 악랄한 집단이다. (당신이 서태지가 쫓겨날 때 한 일이란 무엇인가? 그저 눈물을 조금 흘리고 그저 잊어버리는 일? 어쩌면 당신은 그 폭력구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깐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PS: 이 원고가 끝날 때 들려온 소식은 깐느 영화제 단편영화 부문에서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우수성을 받았다는 결과였다. 진심으로 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