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L Cinema Club』 2002.12.13.베스트

영화교실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 … 101편 이야기

나는 내 보물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을 소유하게 된 행운에는 그것을 도둑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이어 그것이 정말로 무한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뒤를 이었다. 이 두 가지 우려는 나의 오래된 염세주의적 성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게는 친구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호르헤 보르헤스 “모래의 책”

334번째 이야기.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중략)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모든 것을 그 동안 어떻게 사랑해 왔던지를 배웠던 모습이다. 우리는 결국 친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선의, 인내, 공정함, 온후함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점차 그것은 베일을 벗고 새롭게 묘사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우리들의 환대에 대한 보답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을 배우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조차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

두 번째 101편의 영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어린 시절 세상의 영화를 모두 보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도 알지 못하는 공책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의 명단이 잔뜩 쓰여져 있었다. 영화 옆에는 내가 그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이유를 쓰고, 할 수만 있다면 장면 사진을 오려서 붙여놓았고, 감독과 주연, 촬영, 음악, 그리고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들을 꼼꼼하게 적어놓았다. 그 일은 내가 중학교 이학년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작정 쓰는 것은 아니고, 매번 일백 편의 제목을 뽑았다. 매년 설날이면 그걸 새로 뽑곤 했는데, 내가 정말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년 사이에 거기에 쓰인 영화들의 삼분의 일 이상을 하여튼(!)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절대로 주말의 명화극장에서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영화들이 차례로 텔레비전을 찾아오고, 여차저차한 사연으로 갑자기 믿을 수 없게도 그 영화를 볼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생겨난 나의 믿음은 정말 간절하게 소망하면 그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건 내게서 아주 중요한 삶의 태도가 되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는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기울여서 그 일을 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인다.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답이 온다. 하여튼 답이 온다. 안 오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여기 이 명단은 정말 긴 시간을 거쳐서 여기에 온 대답들이다. 물론 전혀 기대하지 않고 보았는데도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들도 있다. 나는 그걸 선물이라고 부른다. 내가 알고 있었던 영화들만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예정조화의 빼곡한 질서만이 세상을 메우고 있다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 일이 되겠는가?

우선 혹시 지난 번 명단이 너무 오래된 것이어서 잊으신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여기에 명단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더한다. 이 명단의 순서는 전적으로 내 방식의 순서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들 제목 앞에 붙은 순서는 순위가 아니다. 이 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두 번째, 이 명단에는 한국 영화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더 큰 이유는 이미 한국영화의 안으로 내가 너무 깊숙이 들어가서 개인적인 추억과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들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판단에 의지해서 선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정말 나 혼자 즐기면서 해야 할 일이지 독자들에게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사실 가장 중요한데 이 명단은 결코(!) 영화사상 101편의 명단이 아니다. 나는 이 명단이 교과서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하니 독자들께서는 이 명단을 섭렵하면 영화사상 걸작 101편을 ‘완전정복’한다고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나는 송성문이 아니며, 홍성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냥 이건 말 그대로 나의 마음을 움직인 101편의 명단이다. 만일 이 영화들을 보고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단은 영화에 대한 나의 진정성이다.

007. 사탄 탱고
벨라 타르, 1991-1993년

영화가 시작하면 안개 자욱한 흑백화면 속에서 나지막하게 비명을 지르듯이 웅웅거리면서 소 떼들이 오간다. 그렇게 영화는 11분 동안 느리게 소 떼를 따라서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한다.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벨라 타르는 이 구원과 절망의 이야기를 거의 멈춘 듯한 속도로 7시간 18분 동안 지속한다. 거의 대사가 없으며,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 있다. 거기에는 무한정한 기다림만이 있다. 고양이를 죽이는 저 잔혹한 씬조차도 마치 멈춘 것처럼 카메라는 저 멀리서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쳐다본다. 또는 천지창조 하듯이 바람이 몰아치는 골목길을 따라서, 종이가 회오리바람에 날리듯이 몰아치면서 두 사내를 뒤쫓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 공간을 미쳐버린 것처럼 놓치지 않기 위해 그저 단 하나의 쇼트로 따라 붙는다. 이 영화는 결코 중간에 보다가 멈추어서, 그렇게 쉬면서 보면 정말 이 영화를 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처음에는 참기 힘들지만, 일단 이 영화의 거의 정지해버린 듯한 속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 안에서 마주하는 것은 이미지와 사운드만으로 만들어내는 황홀경이다. 마치 카프카의 세계와도 같은 이 구조 안에서, 또는 길을 잃기 쉬운 보르헤스의 문장처럼, 아니면 부조리한 아베 고보의 황량한 상황에서처럼, 거기서 버티지 말고 빨리 그렇게 당신의 모든 감각을 내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일종의 명상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속도의 삶 안에서 살아 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베푸는 영혼의 휴식이다.

008. M
프릿츠 랑, 1931년

아이들이 연쇄적으로 실종된다. 거리에 유괴 살인범이 있다. 그 놈을 잡아라. 갑자기 온 도시가 미친다.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부르는 저 무시무시한 노래.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 도시의 텅 빈 거리. 어둠이 내리는 시간. 전봇대에 매달린 풍선. 저녁 탁자의 빈자리. 끝내 돌아오지 않은 아이. 수십 번을 다시 보아도 이 첫 씬은 마치 마술처럼 우리들을 끌어들인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거의 홀린 듯이 우리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점점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들고, 거의 미치기 직전에야 유괴범 페터 로레는 슬픈 얼굴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얼굴을 처음 우리에게 드러낸다. (프릿츠 랑에게 페터 로레를 추천한 사람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이다) 경찰들은 무기력하고, 이제 지하세계의 범죄자들이 그를 뒤쫓기 시작한다. 범인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장님 거지는 유괴범의 등에 분필가루로 대문자 M을 새겨놓고, 그를 뒤쫓아서 온 도시가 미쳐버린다. 아마도 광기에 관한 이보다 더 음산하고도 전율할만한 체험을 영화는 다시 만들어내기 어려울 지 모른다.

하지만 프릿츠 랑이 내게 준 가장 큰 깨달음은 영화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구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러면 그럴수록 그 영화의 시대와 나라에 의해서 성립하지 않은 쇼트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른 남자가 어린 소녀를 데리고 도시를 걸어가는 장면은 그저 평범한 쇼트이다. 그러나 그걸 영화 은 불가능한 쇼트라고 말한다. 그건 여기서 아버지와 딸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어른 남자가 어린 소녀를 데리고 가는 장면만큼 불길하고 교활하며 섬뜩한 쇼트는 없다. 그 순간 우리는 소녀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이 영화가 일차세계 대전이후 아버지들이 전쟁터에서 죽어버린 다음, 또는 엄청난 인플레로 인하여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히틀러 시대 직전의 베를린을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의 쇼트는 구체적인 역사이다.

009.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 2001년

나는 아직도 불길한 흑백화면의 <이레이저 헤드> 가 부담스럽다. (목 잘린 닭이 꿈틀대는 장면, 나는 그걸 보다가 갑자기 달려 나가서 토한 경험이 있다) 또는 <블루 벨벳>을 처음 보았을 때 거의 붙잡힌 듯이 꼼짝 못하면서 잘린 귀의 세계에 빠져드는 제프리의 모험극에 거의 질리다시피 했다. <트윈 픽스> 텔레비전 연작은 전부 보지는 않았고, 그 중에서 내가 관심 있는 감독들이 연출한 에피소드들만을 보았다. (데이빗 린치가 연출한 1, 2, 8, 9, 14, 29, 그리고 팀 헌터의 4, 16, 28, 울리 에델의 21, 다이안 키튼의 22, 제임스 폴리의 24 에피소드) 처음에는 전부 볼 생각도 있었지만 보다가 같은 이야기가 계속 변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죽인다고 말하는 <사구(Dune)> 은 별로 감흥이 없다. 차라리 이 영화는 원래대로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가 훨씬 근사하게 연출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엘리펀트 맨> 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 중에서 가장 따분하다. 처음 절반은 좋은데, 그 나머지 절반은 마치 다른 사람이 만든 게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광란의 사랑> 은 감히 내가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많은 대목들이 논쟁적인데, 특히 이 영화 전체를 감싸고도는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냉소는 그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또는 <오즈의 마법사> 에 대한 아주 특별한 견해를 바란다. 사실 데이빗 린치에게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로스트 하이웨이>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클레르몽페랑에서 보았는데, 보는 순간 거의 넉 다운 당했다. 나는 여기서 데이빗 린치가 미래의 영화에 대한 예언을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 를 보았다. 조금 잘난 척 하면서 말하자면 언젠가 모든 영화는 이 영화처럼 만들어질 것이다. 느리게 진행되면서, 데이빗 린치는 충분하게 영화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속임수이다. 영화를 절반까지 진행하다가, 갑자기 영화의 절반을 다시 시작한다. 두 명의 여주인공은 자기의 자리를 바꾸고, 모든 등장 인물들은 시침 뚝 떼고 다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반복은 위험한 숨바꼭질이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위협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당신의 자리,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아슬아슬한 이야기 구조의 구멍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속지 않으려고 버틸 때, 거기서 데이빗 린치는 영화 안의 시간 구조를 바꿔치기 한다. 영화는 선적으로 진행된다고 믿었던 그 오랜 전통 안에서, 이 영화는 그 시작과 끝의 중간을 매듭지어 놓은 것이다. 그걸 풀려고 하면 할수록 이야기의 실은 엉키고, 그 안에서 인물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계속 같은 장소로 다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정말 무서운 장면들은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갈 때이다. 데이빗 린치는 번번이 같은 장소로 데려가면서도 그 장소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복되지만 사실은 영원히 거기에 도착하지 못한 채 기다림은 무한정 연기된다. 그렇게 거기 도착할 때마다 우리들은 같은 장소를 낯선 장면처럼 마주쳐야 한다.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표류하게 만든다. 어쩌면 나는 다음 번 이 명단에서 데이빗 린치의 다음 영화로 이 제목을 바꿀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멀홀랜드 드라이브> 는 이제까지(2002년 12월 8일)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멀리 나아간 영화이다.

010. 오명
알프레드 힛치콕, 1946년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힛치콕 영화 중의 최고 걸작은 <현기증> 이라는 사실을. 죽은 여자가 살아 돌아오는 저 네크로필리아적인 테마 안에서 힛치콕은 가장 인간의 가장 복잡한 심연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전도된 유혹을 본다. 가장 힛치콕적인 영화는 <싸이코> 이다. 가장 재미있는 영화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다. 가장 완성도 높은 영화는 <이창> 이다. 가장 야심적인 영화는 <새> 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힛치콕의 영화는 <오명> 이다. 그건 이 영화를 처음 본 열일곱살 이후 지금도 그렇다. 정말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이건 내 생애의 영화가 될 거야. 나는 그 순정을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알리사는 자신의 아버지가 나치 스파이로 조국을 배신했다는 괴로움으로 인생을 자포자기하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CIA 의 데블린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버지의 죄를 씻기 위해서 나치 스파이인 세바스찬과 위장 결혼해서, 그 집의 비밀을 빼내라고 설득한다.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빠진 세바스찬은 그녀와 결혼하고, 이제 그의 집에서 창고의 비밀을 찾는다. 하지만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그녀의 비밀을 눈치 채고, 매일 조금씩 독약을 먹인다. 서서히 죽어 가는 그녀는 이제 자기의 힘으로 이 집을 빠져 나올 힘조차 잃는다. 그 순간 데블린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저 안에서 저렇게 다시 한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어떻게 죽어가는 그녀를 나치 스파이들의 소굴에서 데려나올 수 있을까?

<오명> 은 마치 달콤한 독약을 마시는 것처럼 영화 안으로 그렇게 서서히 젖어 드는 영화이다. 저 부도덕한 상황. 모든 인물들이 자기의 마음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힛치콕은 잔인하게도 그 마음을 완전하게 숨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알리사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데블린에 대한 사랑을 서로 속이면서 마치 그러지 않은 척한다. 데블린은 바보처럼 너무 늦게 알리사의 사랑을 깨닫는다. 나치 스파이 세바스찬은 정말 아내 알리사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데블린이 알리사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바스찬의 어머니는 나치 조직을 위해서 알리사를 죽여야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뿐인 아들이 며느리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잔인하게도 이들 마음의 고통을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감추면서 만들어지는 긴장관계를 통해 이끌고 간다. 그래서 앙드레 바쟁은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영화라고 <오명> 을 불렀다. 영화 속의 모든 등장 인물들이 모여서 그들의 이중적인 심리적 긴장을 보여주는 파티 장면은 거의 숨이 멎을 만큼 아슬아슬하다. 또는 천장에서부터 미끄러지듯 내려와서 주머니 속의 열쇠에 이르는 한 쇼트의 기나긴 카메라 이동.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알리사에게 조금씩 독약을 먹이면서 내려다보는 시어머니의 얼굴. 그리고 적들의 한복판에서 데블린이 알리사를 부축해서 데리고 이층계단에서 내려와 문 바깥에 이르는 기나긴 장면.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오분 동안 계속되는 키스 장면이다.

011. 죽음의 안토니오
글라우베 로샤, 1969년

글라우베 로샤의 영화를 보는 것은 광란의 체험이다. 그는 영화를 일종의 민담과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이미지와 사운드는 카니발처럼 날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줄거리를 뒤쫓지 않으며, 자유자재로 그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러나 글라우베 로샤는 정치적인 감독이며, 자신의 조국이 서방세계 제국주의자들의 음모 속에 부서져가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히스테리 환자이다.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 글라우베 로샤는 그 공포를 지나칠 정도로 두려워하면서 폭력적으로 떨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적으로 전개되는 혁명적 투쟁 대신에 광기와 환상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인물들에게로 이끌린다. 그의 삶은 망명으로 이어졌고, 그는 유배된 자로 살았다. 그의 대부분의 영화는 결코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라우베 로샤의 영화는 마음을 뒤흔든다. 또는 그가 쓴 영화에 관한 글들은 고다르나 파졸리니가 쓴 영화의 모더니티에 관한 글들만큼이나 중요하다. 여기에는 그들이 다루지 않은 주제, 영화에서의 모더니티가 어떻게 제 3세계의 문화를 위협하며 그것을 파괴하고 정복하는가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나는 이 글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80년대의 세대이며, 페르난도 앙리끄 카르도소, 테오도니오 도스 산토스, 챠오 프라도, 세르지오 바구, 루이 마루오 마리니, 아르기리 엠마누엘에게서 정치경제학을 배운 세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 심정적인 공감 밑에 깔려있는 동세대 의식) 어쩌면 <죽음의 안토니오> 보다는 이 자리에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사자> 나 <광란의 대지> 를 올려야 할 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최후의 유작 <대지의 시대> 를 위해서 이 자리를 남겨 놓아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죽음의 안토니오> 를 보았을 때 받은 쇼크를 아직까지도 가슴에 안고 있다. 안토니오는 살인청부업자이다. 그는 의뢰를 받으면 상대를 죽인다. 무대는 마치 마카로니 웨스턴과도 같은 황량한 벌판과 목장들. 그리고 끝없는 착취 속에서 탄압 받는 농민들. 부자들과 군대와 교회는 농민들을 착취하고, 이에 저항하는 의적단이 생겨난다. 브라질의 저 오래된 전통. 안토니오는 이들 의 적단을 죽여서 현상금을 타는 사내이다. 죽음의 노래와 성녀, 정치적인 기나긴 토론, 그리고 서부극을 방불케하는 격렬한 총격전,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안토니오는 착취자의 편인지, 아니면 농민들의 편인지 끝내 구별할 수 없는 입장에 선다. 글라우베 로샤는 정의는 땅에 떨어졌고, 혁명은 다가왔으며, 최후의 승자는 누군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명백히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레닌의 책을 열심히 읽은 것이 분명한 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보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그 혼란스러운 지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는 분명하다. 글라우베 로샤의 말. 혁명은 목전에 다가왔다. 이제 그건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희망이 있었던 세대가 있었다.

012. 부운
나루세 미키오, 1955년

만일 울고 싶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본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루세 미키오는 패전 직후 일본을 살아가는 삶을 마치 외국인처럼 쳐다 본다. 여자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면서 그의 뒤를 쫓아가고, 남자는 아무 것도 책임질 수 없는 자신을 탄식하면서 자포자기한 채로 살아간다. 그건 마치 지옥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어찌할 줄 모르면서, 그저 그렇게 가난 속에서, 폐허가 되어버린 동경 시내를 거닐면서, 그들 사이를 지나쳐 가는 노동자들의 인터내셔널가를 무심코 쳐다보면서, 전기가 부족해서 거의 꺼져 가는 듯한 음침한 여관방에서, 그들만의 장소를 찾아 떠돈다. 이 영화의 제목 그대로 떠도는 구름처럼.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안을 때에만 신기하게도 얼굴이 밝게 빛난다. 그때마다 그들의 얼굴 위로 멀리서 저 이국적인 볼레로의 선율이 들려온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걸 무한정 연장하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들에게 그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구름은 이렇게도 흘러가고, 저렇게도 흘러간다. 그들의 삶도 그렇게 이러 저리 찢겨지면서, 번번이 그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면서 흘러간다. 결국 두 사람은 저 머나먼 남쪽 끝 섬까지 흘러간다. 거기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남자는 멀리 떠나 있는데 이제 더 이상 몸을 추스릴 수 없는 여자는 그렇게 숨을 거둔다. 남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기는 것은 오직 그만을 위해 여기까지 흘러온 이 여자의 시신이다. 아직도 살아있는 것 같은 그녀의 얼굴 위에서, 그 남자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이제 그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그때 저 질기디 질긴 볼레로의 선율이 다시 흘러나온다. 나루세 미키오의 연출은 이 순간 부조리하면서도 경이적이다. 바깥에는 세상을 단숨에 날려버릴 듯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방안에 들어온 순간 나루세는 모든 사운드를 지워버린다. 이것은 후시 녹음의 기적 같은 순간을 찾아낸다. 모든 사운드가 지워지고, 오직 나루세가 들려주고 싶은 유일한 소리,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순간 이 가슴을 사무치는 멜로 드라마의 이야기는 숭고하게도 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의 고독을 드러낸다. 리얼리즘의 지옥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단숨에 초현실주의적인 감흥을 자아내는데 성공하고야 만다. 영화의 기적은 바로 이러한 순간에 있는 것이다. 나는 나루세의 이 슬프고도, 슬프고도, 슬프고도, 슬프고도, 슬픈 영화를 살아가면서 몇 십번이고 다시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