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DEOPLAZA』 1994.04.작품

올란도

갑작스러운 유행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처럼 우리 사이를 떠도는 말이 있다. 페미니즘(feminism)은 도대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일까?

▲ 1700년, 다섯번째 에피소드. 정치(POLITICS). 영국의 대사로 중앙아시아에 온 올란도는 이국땅의 왕 칸과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남자들의 정치는 권력과, 전쟁과, 배신이며 우정이란 거기 없다. 올란도는 실망하고, 이제 남자이기를 그만두고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남자로서의 200년을 끝나고, 여자로서의 200년이 시작된다.

▲ 세번째 에피소드. 1610년, 사랑(LOVE), 올란도는 소녀 샤샤에게 배신당하고 여자란 존재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결심한다.

▲ 여섯번째 에피소드. 1750년, 사교계(SOCIETY), 여자가 된 올란도는 사교모임에서 시인과 철학자와 모험가를 만나지만, 오직 여자로서의 올란도에게만 관심을 보일 뿐 아무도 그녀와 대화하려 들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사교의 대상이고, 남자는 여자에게서 사랑의 대상이다.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숙명인가?

▲ 네번째 에피소드. 1650년, 시(POETRY). 이 장면을 유심히 보실 것. 올란도의 시선은 카메라의 중심에 놓여있다. 그 시선은 바로 관객과 일치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화자(話者)가 되어 관객에게 말을 걸고, 그래서 관객은 이것이 영화라는 객관적 자리에 서게 된다. 샐리 포터는 종종 이 화면구도로 관객을 객관적 위치에 두어, 영화에 대해서 비판적 관점을 갖도록 유도한다.

▲ 여섯번째 에피소드, 1750년 사교계. 올란도는 여자가 되어 그녀에게 하사되었던 저택을 모두 압수 당하게 된다.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그녀가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 뿐이다. 결혼은 소유의 사회적/개인적 이중관계이다.

▲ 일곱번째 에피소드, 1850년, 성(SEX). 올란도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유주의자 쉘 머딘을 만난다. 그러나 그녀는 소유되지 않기 위하여, 임신하고 그를 떠나 보낸다. 가족은 남자의 사유재산의 토대이다.

우선 경계해야 할 것들, 페미니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사이버 펑크와 같은 '일시적인' 사기극이 아니다. 이것은 좌파이면서 우파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 어떤 전선 보다도 진보적이다. 심지어 좌파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만약 마르크시즘이 우리의 세기를 패배한다면 그것은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공격하였다.

또한 페미니즘은 끊임없이 자기 소비의 순환과정으로 끌어들여 마치 서구의 패션처럼 다루려는 모드로서의 의지도 있다. 이들은 페미니즘을 여자의 속옷 정도라고 생각한다. 사방으로 단어가 번져나가고, 그리고 여기에 전염된 소비 욕망의 주체들(대부분이 여성이긴 하지만)은 새로 핸드백이나, 신발이나, 치마를 입고는 자기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위대한' 착각에 바진다. 다소 고급스러운 전략도 있다. 난데없는 페미니스트 에세이와, 텔리비전 프로그램과, 소설과, 연극과, 영화가 범람한다.

그러나 그것은 페미니즘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적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 영화에서 페미니즘을 실현 시킨다면 그것은 어떤 이야기와, 어떤 형식과, 어떤 스타일과, 어떤 구조를 지녀야 하는가?

지금까지 페미니즘 영화들은 지나치게 대안적 산업영화의 태도를 취하고 있거나,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 형태의 기록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대중영화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것은 소수의,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지엽적인 문제의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 이제 대중 노선의 연대세력을 만들고 전선을 형성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전분야에서의 노력은 영화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샐리 포터 감독의 '올란도'는 90년대 페미니즘 영화의 새로운 출발이다.

우선 원작 '올란도'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소설 '올란도'는 여류 소설작가 버어지니아 울프가 1922년 비타 색크반-웨스트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버어지니아 울프는 남편과 함께 런던에서 이미 그녀의 대표작인 '달로웨이 부인' 과 '등대 쪽으로' 를 발표하고 난 뒤였다. 런던에는 버포러트 럿셀이나 E.M.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전만좋은 방'의 저자) 등 지식인들과 함께 매주 모이는 블룸스버리 그룹이 있었다. 여기서 버어지니아 울프는 당시 소설가이면서 또한 정원 디자이너였던 '여자' 비타 섹크반-웨스트를 만나 한눈에 빠져 들었다. 그것이 동성애적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 1세로 부터 그녀의 가족에게 하사된 거대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비타 색크반-웨스트는 여자라는 이유로 상속받거나 소유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남편 소유가 되었다. 그래서 색크반-웨스트는 버어지니아 울프에게 종종 '나는 남자로 태어났어야만 하는데'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에 연민과 함께 영감을 얻은 버어지니아 울프는 자신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에게 (즉, 버어지니아 울프가 색크반-웨스트에게) 연애편지 형식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놀라움을 안겨주기는 했으나 성적 전이(trans-sexuality)에 대한 야심적인 전복을 기도하고 있는 이 모더니즘 소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 소설은 그 후 출판업자를 찾아 떠돌다가 1982년에야 비로소 발표되었다.

이 소설에 샐리 포터가 매혹된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한 인물 올란도였다. 그는 400년 동안 살면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항상 같은 나이이다. 그러나 그는 첫 200년을 남자로 살고, 나머지 200년을 여자로 살아간다. 두가지 삶을 살아가는 인물 올란도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것일까? 샐리 포터는 아이덴티티와 사회 사이의 계약관계에 관심을 집중 시킨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태어나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신중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화살이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 샐리 포터는 버어지니아 울프 소설을 감싸고 있는 모더니즘의 흔적을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녀는 과감하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적 방법을 가져온다. 그녀가 활용하는 것은 영화 전체를 8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서, 매번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에 연도를 지정하고, 그리고 그 연도를 하나의 자막으로 설명함으로써 관객이 드라마에 빠져드는 대신 그것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모더니즘에서의 작가의 자의식의 흐름에 이끌려 십사리 주관주의적 내면 대화의 자동기술로 빠져들 수 있는 일인칭 화법을 배제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샐리 포터는 영화의 장면에 관한 주석이나 설명, 또는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을 주인공을 통해서 활용한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이 영화의 화자이면서, 한편으로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내는 나레이터이다. 그는 영화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다.

영화의 시작은 17세기 초 엘리자베스 여황 시대에 나무 밑에 앉아 여황에게 바칠 시를 준비하는 올란도(탄다 수윈튼)를 보여준다. 올란도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여왕과 사교계의 중심에 자리한다.

바로 그 올란도를 보여주는 카메라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좌우대칭 구도 속에서 화면의 소실점을 화면 바깥으로 내보낸 구도로 담긴다. 이것은 이제 왕정제의 제도하에 있으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이후 봉건제에 이어 자본주의 산업혁명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정확하게 시각적으로 르네상스의 시대정신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두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은 '죽음'. 시대는 1600년. 올란도는 여왕에게 사랑을 받고 거대한 저택을 하사 받는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수수께끼같은 말을 던진다.

"시들지도, 죽지도, 자라지도 말거라"

이 말은 일종의 마술처럼 올란도를 거기서 멈추게 만든다. 여기서 올란도의 정지는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 에서의 오스카의 정지와는 다르다. 오스카는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올란도에게 그것은 운명으로 다가온다. 그 운명은 이중적이다. 올란도는 시간의 질서 바깥으로 나가지만,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조건에 대해서 더 많은 인과율을 의존한다.

그리고 죽음은 그의 곁을 찾아온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후견인이었던 여왕은 모두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은 또한 올란도의 탄생이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1610년, 소제목은 '사랑' 이다. 올란도는 러시아 대사의 딸 샤샤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바져서 약혼녀를 배신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샤샤는 올란도를 배신하고 상심한 올란도는 6일동안 잠든 후에 일어나 여자란 존재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말한다.

우선 이 에피소드는 여자의 배신과 남자의 배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신하고 배신 당한다. 그 배신 이후 올란도는, 마치 성서 속의 일주일 처럼, 신의 휴일인 7일째 잠이 깬다. 그는 배신을 통해 두번째 삶을 갖는다. 올란도는 이제 더 이상 성의 구별이 없는 아이가 아니라, 여자란 존재와 자기를 차별화 시키는 남자로 만들고, 그래서 이제 여자에 대한 남자의 우월을 확인한다.

네번째 에피소드는 1650년, 소제목은 '시' 이다. 올란도는 실연당한 고통을 시 쓰기로 잊으려고 한다. 그래서 당대의 위대한 시인 닉 그린을 초대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러나 닉은 올란도에게 부당한 요구와 함께 모욕적인 혹평을 한다. 올란도는 시인이 되기를 포기한다.

샐리 포터는 네번째 에피소드를 의도적으로 여자의 배신과 전쟁('정치'라고 이름 지어진 다섯번째 에피소드) 사이에 넣는다. 올란도는 자기의 삶에 관한 예술적 성찰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동경하는 예술가는 배고품과 가난에 지쳐있는 모습을 확인한다. 예술이란 그저 지나쳐가는, 사회적 관계 내에서 일시적인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술이란 올란도에게, 귀족에게,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올란도의 다섯번째 에피소드는 1700년, '정치'로 이어진다. 그는 여기서 중앙 아시아의 왕인 칸을 만나서 형제같은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우정이란 세상과 맞지 않는다. 제국주의 전쟁은 올란도에게 또 다른 배신을 안겨주고, 끔찍한 살륙을 본다. 그는 두가지 모두에게 실패한다. 예술도, 정치도 올란도에게는 실망과 좌절을 안겨줄 뿐이다.

올란도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다시 6일 밤을 자고 7일째 깨어난다. 깨어났을 때 올란도는 이제 여자로 변신한다. 그는 남자로 누릴 수 있는 200년간의 삶을 실망하고 이제부터 여자로 살아갈 결심을 한다.

여자로서 올란도의 새로운 삶은 1750년 '사교계'에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귀부인으로 나타나지만 그녀가 갈 수 있는 장소는 이제 사교 모임 뿐이다. 보석과 화려한 옷으로 감싼 올란도는 여자라는 존재가 남자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라, 재산권도, 인격도, 자기 존재도 증명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왕실로 부터 올란도는 여자가 되었기 때문에 여왕으로 부터 하사받은 저택을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녀는 여자가 됨으로써 법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곱번째 에피소드는 그로부터 100년 후인 1850년이다. 소제목은 '성', 남자 올란도에게는 사랑이었던 상대가 여자 올란도에게는 성(sex)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자유주의적인 쉘머린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올란도는 쉘머린을 사랑하면서도 그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결혼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가정이 아니라 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올란도는 정식으로 왕실로 부터 재산을 몰수 당하고, 자유주의자 쉘머린은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모든 것을 잃고, 올란도는 여기 남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제목은 '탄생'. 주의해서 볼 것. 여기에는 시대의 표시가 없다 현재일 수 있고, 그리고 미래일 수도 있다.

그 다음, 올란도는 이제 딸과 함께 있다. 그런데 버어지니아 울프의 원작은 아들로 되어있다. 이것은 샐리 포터의 신중한 선택이다. 만일 아들을 낳게 된다면 올란도는 다시 재산권과 가족의 문제로 휘말려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샐리 포터는 그것을 딸로 설정하여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상실, 그 모든 관계로 부터의 해방을 가정한다.

그리고 올란도는 딸과 함께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장면에 앉아있떤 바로 그 나무 아래로 온다. 거기서 올란도를 바라보는 화면이 갑자기 비디오 캠코더로 바뀐다.

비디오 캠코더는 두가지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 하나는 지금가지 르네상스적 화면 구도를 시종일관 했던 남성중심의 시선으로 부터 올란도의 딸이, 여성의,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시작하는 그녀의 시선으로 다시 서술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올란도의 딸의 시대에 관한 새로운 연대가 시작된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샐리 포터는 진심으로 남성들에 의해 지금까지 만들어져 온 영화의 역사를 할 수만 있다면 폐기처분시켜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을 '올란도' 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올란도의 딸의 비디오 캠코더에 의하여 보여지는, 올란도가 보는 것은 하늘에 떠서 그녀에게 찬가를 비치는 천사이다. 이것은 페미니즘의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를 희망하는 눈물겨운 결론이다. 지금가지 누가 이렇게 절실하고도 확신에 찬 페미니즘영화를 만들었단 말인가? 샐리 포터의 '올란도'는 논쟁을 제기하고 위험한 내기를 걸고 있지만, 그러나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일시적이고 철없는 페미니스트 추종자들과 그 사기꾼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험난하고 긴급한 과제인지를 그 어떤 영화보다도 진지하게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우리 동세대의 잠언이기도 하다. '올란도'는 비타 색크빌-웨스트에게 연애편지를 쓴 버어지니아 울프에게 샐리포터가 바치는 헌사이다. 세명의 여자 사이의 50년에 걸친 연대적 우정에 관한 400년간의 역사모험극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