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DEOPLAZA』 1995.03.작품

뤽 베송 감독, 장 르노, 나탈리 포트만 주연

할리우드 언더웨어 입은
프렌치 무비 <레옹>

<마지막 전투>, <서브웨이>, <그랑 블루>, <아틀란티스>. 프랑스의 새로운 노선 누벨 이마쥬의 감독 뤽 베송의 신작인 <레옹>은 프랑스 파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24시간 논스톱으로 상영되는 이 화제의 작품은 프랑스 영화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연일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전통을 교모히 따르고 있는 이 프랑스 감독을 우리는 변호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비판해야 옳은가?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덮는구나.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이제 어떻게 사라져가는가를 근심하는 것은 모든 새로운 물결들의 걱정이기도 할 것이다.

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새롭게 등장한 '새로운 노선'이라는 전선의 결성 이래 누벨 이마쥬(nouvelle lmage:새로운 영상!) 세대라고 불리우는 시네아스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경향과 미학과 스타일과 전통을 따라가며 작업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70년대 프랑스영화를 부정하였다. 프랑스영화의 70년대는 어떤 의미에서 치욕의 역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누벨 바그의 정신은 모두 증발하였고(심지어 누벨 바그에서 출발한 감독들도 조차 변절하거나 침묵을 지킨 10년!), 텔레비전은 영화를 장악하였고, 프랑스영화는 실험을 버리고 방송대본 같은 시나리오에 매달렸다. 결과는 끔찍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모든 것은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다시 좋은 프랑스영화를 만들자고? 천만의 말씀. 그 사이에 할리우드 직배영화사들이 영화관을 초토화 시켜버렸다. 누벨 이마쥬는 위기 속에서 다시 시작한 절망의 대안이다.

잘 알려진 대로 누벨 이마쥬 세대의 거장(너무 서투른 표현이기도 하지만!)은 <베티 블루>의 장 자크 베넥스와, <나쁜 피>의레오스 까락스와, <동정없는 세상>의 에릭 로샹과, <파수병>의 아르노 데스뽈라셍과, 그리고 <그랑 부르>의 뤽 베송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그들은 성공했는가?

유감스럽게도 누벨 이마쥬는 해놓은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이 전혀 좋은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장 자크 베넥스는 프랑스 상업영화의 전통을 다시 팻션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영화의 스타일과 제스츄어를 새롭게 만들어놓았다. <디바>는 사운드를 통해서 그려낸 스타일의 장르와 제스츄어의 팻션이다.

레오스 까락스는 영화와 사진 사이의 짧은 역사 사이에서 고군분투한다. 영화는 그에게서 이미지의 근심이다. 그는 종종 무성영화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을 거기서 멈추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에서 까락스는 영화가 이미지 스스로 말하는 복화술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을 목표로 하고있으며, 그래서 까락스는 점점 더 반(反) 누벨 이마쥬적인 사로 속으로 침잠한다. 그는 영화의 고전주의자이다.

에릭 로샹은 레오스 까락스의 반대편에서 출발한다. 그는 통속성을 사랑한다. 거기 일상생활의 진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샹은 네오 리얼리즘과 누벨 바그를 반쯤 걸쳐 서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영화가 감정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라는 30년대 포에틱 리얼리즘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렇다면 뤽 베송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뤽 베송은 그 자신의 동세대안에 있으면서 또 한편 바깥에 있다. 그는 영상이 원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능수능란하며, 수많은 영화를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영화광임에 틀림없다. 뤽 베송은 자기가 원하는 영상을 상상 속에서 끌어내 화면에 담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재주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뤽 베송은 엉뚱한 선택을 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뤽 베송은 끊임없이 의심받았다. 그리고 이제 분명해졌다. 그의 데뷔작 <마지막 전투>는 할리우드 50년대 B급 SF영화의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 두번째 영화 <서브웨이>는 놀랄 만큼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고전들에 가까이 다가 서 있다. 세번째 영화 <그랑 부르>는 70년대 버디 무비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네번째 영화 <니키타>는 흔히 필름 느와르와 갱스터의 변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다시 한번 곰곰히 뜯어보면, 아웃 사이더들을 찬양한 50년대 틴 에이저 로멘스영화의 정신적서자이다. 뤽 베송의 영화적 자화상이라고 불리우는 기록영화 <아틀란티스>는 더 나아가 월트 디즈니의 60년대 다큐멘터리적 전통의 혐의가 짙다. 그러나 모두들 단언 내리기를 망설였다 .그것은 그러한 영화적 흔적들이 뤽 베송의 상상력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끈을 맺고 있어서 쉽사리 추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혐의는 뤽 베송의 자백으로 나타났다. 그는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레옹>에서 모든 것이 사실이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옹>은 거의 장-삐에르 멜빈 감독의 <사무라이>(67년, 국내 개봉명<고독>)의 리메이크처럼 보인다. 멜빌은 이 영화에서 프랑스 풍의 필름 느와르를 만들어낸다. 고독한 살인 청부업자. 아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저 새장 속의 새 한 마리를 기르며 혼자 살아간다. 그러다가 주문이 오면 그는 용서없이 해치운다. 그러던 그가 그만 자신에게 주문이 온 한 나이트 클럽 여가수를 사랑하고 만다. 그는 이제 직업의식과 가슴 한 구석에 있던 로맨티시즘으로 갈등한다.

그러나 이것은 장-비에르 멜빌의 오리지널이 아니다. 이건 마치 셀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에서 할리우드 서부영화와 일본 사무라이영화를 뒤섞어 놓은 것처럼 40년대 필름 느와르를 변형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뤽 베송은 그 변형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또 한편으로 그 변형의 오리지널을 찾아 미국에가서 고군분투한다.

레옹은 살인 청부업자. 그는 뉴욕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이탈리아계 시칠리아인이다. 친구도 없고 동료도 없다. 그런 그가 우연히 아파트 옆방에서 미치광이 마약반 형사 스탠(게리 올드만의 압도적인 연기!)에게 가족을 몰살당한 12살 소녀 마틸다를 맡게 된다. 마틸다는 레옹에게 자신도 '인간 클리너'(말 그대로 청소부)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레옹은 이 작은 소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놀랄 만큼 유사한 <레옹>에서 뤽 베송은 기꺼이 장-삐에르 멜빌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신다. 그러나 멜빌의 주인공이 30년대 프랑스영화의 쥘리앙 뒤비비에 영화 속의 장 가방(특히 <망향>에서의 이미지!)을 빌려 왔다며, 베송은 여기서 아주 솔직하게 할리우드 영화의 전통을 따른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변호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비판해야 옳은가?

장 르노가 연기하는 '레옹'은 이미 우리가 그의 네번째 영화 <니키타>에서 그녀를 돕기 위해 보내진 전문 살인 청부업자로 '예고편'을 보여준 셈이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청소부'(이 영화 속에서 그의 암호명은 '클리너'였다)로 이미 우리에게 첫인사를 마친 셈이다. 그리고 <레옹>에서 그에게는 그 대신 피와 살을 부여받는다.

뤽 베송이 장 르노에게 뒤집어 씌운 이미지는 존 웨인과 험프리 보가트이다. 이 상반된 스타 이미지가 레옹의 모순된 성격을 반영한다. 존 웨인은 악당들과 맞서 용기있게 싸우면서도 결코 여자와 아이를 건드리지 않는 배역을 고집햇던 스타이다. 그는 종종 어리석을 만큼 순진한 실수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레옹의 철칙은 '살인에 대해서 죄책감은 없지만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어떤 상대도 기어이 임무를 수행하지만 반면 자신이 받는 보수가 모두 사기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는 마치 유아기에서 성장을 멈춘 살인 청부업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거래 방식은 용서가 없다. 그것은 험프리 보가트에게서 배워온 것이다. 험프리 보가트는 따뜻하지만 결코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온 마음을 쏟아 배려하면서도 겉으로는 매정하게 "이건 거래니까 지키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그건 뤽 베송이 단순히 스타 이미지만을 가져온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필름 느와르(험프리 보가트로 상징되는!)와 서부극(존 웨인으로 그려진)을 동시에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레옹이라는 인물의 생존방식은 그 두 개의 장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나 뤽 베송은 레옹의 성격을 그리면서 그가 만나는 두 명의 인물 속에서 일종의 장르적 분열을 일으킨다. 그가 정성을 들여 만들어낸 두 명의 인물은 마틸다와 스탠이다. 그러나 이들도 수상쩍다. 그들도 어디서 본 듯한 인물이다.

12살 소녀 마틸다는 놀랄만큼 무성영화시대의 요부 루이스 브룩스를 그대로 베껴왔다. 그녀는 루이스 부룩스의 상징인 검은 머리에 컷트 헤어스타일을 똑같이 흉내낸다. 루이스 브룩스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녀는 40년대 필름 느와르 영화 속의 '운명적인 여자(female fatal)'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마틸다는 먼 길을 돌아서서 우회하여 레옹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필름 느와르 속의 전형적인 소녀가 레옹의 존 웨인적인 모습과 만난다. 그래서 마틸다와 레옹은 무언가 엇갈린 만남의 관계를 지속한다.

또 한 명은 마약에 빠진 형사 스탠이다. 그에겐 선도 악도 없다. 폭력에 빠져 있으며, 도덕도 없고 정의도 없는, 일종의 종말론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마카로니 웨스턴의 악당이다. 그러한 그가 만나는 레옹은 존 웨인이 아니라 필름 느와르의 험프리 보가트이다.

이건 분명히 뤽 베송이 고의적으로 뒤틀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장의 비극적 결말을 유도하는 것이다. 모순을 통해서 거기서 파멸을 이끄는 것은 우리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증후라고 부르던 것이었던가?

그러나 뤽 베송은 여기서 무언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레옹>을 만들면서 헐리우드영화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반대로 할리우드의 전통 속에서 프랑스적인 영화에스프리를 끌어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가? 그는 마치 가짜로 가짜를 베기는 듯한 이중의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그는 원본을 잃어버리고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며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뤽 베송은 뉴욕거리에서 살인 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거기서 스스로 타자의 공간으로부터 빚어낸 타자의 코뮤니티(이 이중의 타자가 주는 이중의 모순)에서 자신의 자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그 어떤 국적도 없는 기이한 영화를 만든 셈이다.

돌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갸아 할 것인가? <레옹>은 뤽 베송만의 딜레마가 아니라 프랑스영화 전체가 부딪친 딜렘마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그만큼 지금 영화의 중심이며, 뿌리이며, 더 나아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커다란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