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안내

*. 이 곳은 정성일씨의 글을 모은 김석영의 개인홈페이지입니다.

홈페이지의 존속 여부는 언제나 콘텐츠였습니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선택한 주제는 '정성일'입니다.
영화는 시간을 지나며 고전을 남기고,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들과
함께 끝없는 해석들을 낳을 것입니다.
여기 쓰여진 글들은 그런 영화에 대하여 정성일씨가 쓴 글들입니다.
그의 영화읽기에 흥미를 갖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좀 더 편한 글읽기를 위해 모든 글의 문단 시작은
한칸 들여쓰기를 하였으며 문단과 문단 사이는 한 줄을 비웠습니다.
글을 펴내는 곳의 편집 그대로를 옮기려 노력하였으며,
출처를 명시하면서 웹페이지가 존재하는 경우는 링크를 두었습니다.

제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2001년 1월. 김석영

email : for.jsi.typing at gmail
twitter : @jsi_archive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 웹진 '영화천국' > 2012.10.26 Vol.28 > [특집] 90년대 후반, 영화광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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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키워드

영화평론가 정성일

글 김석영/ 정성일DB (글 링크)

처음 ‘정성일’이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 건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자주 듣던 라디오 방송이 지루해 무심코 돌린 주파수 채널에선 교육방송에서나 들려올 법한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난 뒤, 방송에서 말한 영화가 내가 아는 그 영화가 맞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1993년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시작으로 신문 칼럼이나 도서관 서가에 꽂힌 잡지에서 그의 이름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그의 글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PC통신에서는 그의 글을 타이핑해 올리거나, 그의 말투를 모방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한겨레>와 <말>지에 수록된 그의 칼럼이 회자되었고,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그가 하차한 아쉬움은 1995년 <키노>의 창간으로 메워졌다.

영화에 대한 정보 창구가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가고 있을 무렵, 집에 쌓인 복사지 뭉치를 앞에 두고 그의 글을 모은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여러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영화 관련 책과 잡지에서 그의 글을 수집했다. 이윽고 오픈한 홈페이지에는 많은 사람이 방문했고, 그들을 직접 만나 다양한 의견을 교환할 기회도 얻었다.

홈페이지를 오픈한 지 10개월이 지난 2001년 11월, 장충동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에서 강의를 하던 그를 찾아갔다. 그는 이미 홈페이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그에게서 “김석영 씨는 영화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내게 영화를 사랑한다면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했다. 난 그러지 못했지만, 그는 9년 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이름을 내건 영화를 만들었다.

1990년대에 생겨난 수많은 ‘정성일 키드’들이나 영화와 관련된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그의 궤적을 정리하다보면, 내가 한국영화사의 일부분을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1998년 11월 < PAPER >와의 인터뷰에서 “최선의 선택은 못했지만,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술회한 그의 말처럼, 앞으로도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그렇게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 영화글 > 영화칼럼 > 나의 사사로운 아카이브 연대기(2017.04.12) ]

나는 수집가였다. 그리고 구두쇠였다. 수집에는 돈이 드는 수집과 돈이 들지 않는 수집이 있다. 미취학 시절 금이라고 주워와서 빈 유리병에 모으던 식빵봉투용 철사심 끈은 공짜였지만, 길 건너 문방구에 새로 진열된 지우개를 손에 넣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구두쇠 수집가의 딜레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옆 짝꿍이 우표를 자랑했다. 우표수집은 전염된다. 우표는 구매한 금액만큼 고스란히 우편용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구두쇠로서 최고의 수집 동기이며 핑계이다. 체신부는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취미우표를 발행하고 있었다. 주변의 재력 있는 아이들을 유혹했다. “철수야, 취미우표라는 게 있어. 어떤 우표는 나중에 엄청 비싸게 되팔 수 있대.” 그렇게 여러 명을 모았다. 취미우표를 발행하는 날이면 점심시간에 선생님 심부름으로 둘러대고 나갔다. 성내동 우체국을 부리나케 다녀오면 구매대행 수수료가 남고 그 몫으로 내 우표를 샀다. 그 고객들이 한 살 더 먹으면 다른 반으로 흩어졌고 거기서 또 자랑했다. ‘클럽에 대해 알리지 말라’는 파이트클럽의 규칙 같은 것도 없으니 날로 사업이 번창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이해 못 한 채 모든 라디오방송의 채널 편성표를 수작업으로 작성하였고, 특정 작곡가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테이프에 편집하던 1993년, 나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에 도착했다. 다른 방송들과 달랐다. 매주 출연한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더 달랐다. 영화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의 글을 모으기 시작했다. 집에서 구독하지 않는 신문과 잡지는 도서관에 있었다. 복사비는 적은 돈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10년이 되니 복사 뭉치는 백과사전 분량이 되었다.

인터넷이 생겼다. 대학 신입생의 필수 수강과목에 홈페이지 만들기 수업이 있었다. 네이버, 드림위즈, 하나포스, 천리안을 포함해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안전보건공단에서도 개인용 홈페이지 공간을 나눠줬다. 5~20MB씩 나눠주는 무료 공간을 긁어모아 '정성일 글모음 페이지'를 2000년에 만들었다.(seojae.com/critic) 스스로 자료를 찾기 위해 만들었던 목적이 컸다. 각 매체에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허락을 얻었고, 온라인 지면의 게재에 대한 계약이 따로 없었던지라 3년이 지난 출간물은 글쓴이에게 저작권이 돌아오는 것으로 암묵적 동의를 하여 업데이트하였다. 정성일 선생님의 추가 요청에 따라 복사금지기능을 추가했고, 2015년에 모바일 환경에 맞춘 개편을 하여 현재 1,926건의 글이 등록되어 있다.

1995년 창간한 영화 월간지 KINO는 예전에 봤던 내용을 다시 찾기 어려웠다. 특정 감독들의 인터뷰는 나중에 찾기 위해 따로 목록으로 정리해야 했다. KINO도 2000년 공식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KINO의 낱개 기사들을 유료로 판매했다. 하지만 제목도 순서도 검색도 엉망인 채였다. 잘 팔리지 않았는지 그 PDF 파일들을 2002년 무료로 공개했다. 총 2,948개의 PDF 파일과 PDF로 제공되지 않은 기사까지 인쇄본과 대조하여 2005년 인덱스 페이지를 오픈했다.(seojae.com/kino) PDF 본문검색은 네이버 블로그를 이용하고(blog.naver.com/kino1995), 인덱스 검색은 이글루스 블로그를 사용했다(kino99.egloos.com). KINO의 웹 부문 사업체였던 엔키노는 2004년 CJ 계열사로 편입된 뒤 2006년 운영 중단했으며 2007년 사업 청산되었다. 운영중단으로 2기가에 달하는 파일이 사라지고 나니 다운로드해두었던 PDF 파일들을 직접 인덱스 페이지에 걸려면 돈이 필요했다. 2년 뒤 기술의 발달로 스토리지 비용이 낮아지자 거대한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는 업체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무료정책변경으로 skydrive, dropbox를 거쳐 지금은 archive.org를 저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슬프게도 정은임 아나운서가 2004년 사고로 사망했다.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졌고 그녀의 아버님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녹음한 라디오 방송 테이프들을 3년 반 동안 민연홍 님이 파일로 변환하여 추모사업회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팟캐스트를 듣던 시기가 왔고, FM 영화음악을 쉽게 다시 들을 수 있도록 추모사업회의 파일을 기반으로 팟캐스트를 2010년에 만들었다.(seojae.com/podcast) 총 832개 16기가의 파일을 호스팅하던 추모사업회 홈페이지는 2016년부터 갑자기 접속되지 않았고, 저장 받아둔 방송파일들을 KINO PDF와 마찬가지로 archive.org로 옮겨서 비용 없이 제공하고 있다.

모두 개인적인 편의로 시작하여 이젠 한 달에 5천 원 가량의 유지비도 필요하지만, 이 페이지들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배우자를 만날 수 있었고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익힌 기술로 관련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육아로 여유가 없어서 다음 프로젝트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 또한 스스로의 편의에서 시작한 아카이브이겠지만 덩달아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게 될 것이다. 고마운 날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