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 봉준호, 임권택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글: 정성일(영화평론가) / 2014-09-23 (기사링크)
이렇게 말을 꺼내들고 싶다. 봉준호는 CJ가 아니다.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봉준호는 홍상수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읽었다면 당신은 내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점점 CJ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대중적 흥행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엉성하게?) 작성된 매뉴얼을 검토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일은 이야기를 만든 다음 그게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물러나서 남은 인상만을 가지고 엉성하게 (정교하게?) 그려낸 재빠른 스케치를 약간 아슬아슬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봉준호가 영화 제작에 돌입할 때 장르를 다루는 것인지,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인지 약간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종종 영화 앞에서 그가 만들어놓은 콘티가 영화를 보는 내게는 매뉴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일사불란한 영화적인 기계 기호들의 운동. (<살인의 추억>) 일단 시작되면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쇼트들의 접합과 그 안의 변화. (<설국열차>) 그러나 그 도표는 대중적 흥행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마더>) 이때 그의 매뉴얼은 그 자신의 매우 사적인 영화(歷)사의 (그 자신에게만) 명장면에 관한 다소 기형적인, 어쩌면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변태적으로 구부러트린 집합처럼 보인다. (<괴물>) 그게 일정한 순열로 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것처럼 보이는 리듬 사이에서 삑사리의 순간들이 섬광처럼 나타날 때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집합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고 싶게 만든다.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의 영화는 매번 그 안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는 (그래서 여전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분리된 또 하나의 집합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둘 사이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지만 그렇게 연쇄망을 이루는 그 고리를 따라 가다보면 어떤 집합들은 중심과 완전히 공집합을 이룬 채 영화 안에서 마치 독립변수처럼 활동하는 쇼트를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잉여의 공집합은 잘 눈에 띄지 않은 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마더>에서의 나무. 아마도 21세기 한국영화에서 가장 불길하고 아름다운 나무.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른 ‘마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홀로 서서 마치 우주의 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나무. 그 나무를 하나의 점으로 하여 이미지가 회전을 시작할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건을 기다리는 사건이라는 간접화법의 (미처 닫히지 않은) 원을 그려내는 운동이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