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검 A Sword Under the Moon
글:정성일(영화평론가) / 2015-02-16 (기사링크)
사태가 대단히 복잡하지 않은가. 상징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현전은 부재이며, 지연되지 않은 것이 지연되며, 희열은 죽음의 위협이다. 더구나 이런 체계, 대리보충의 이 이상한 경제에 추가되어야 할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미 판독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협인 대리보충은 또한 최초의 가장 확실한 보호라는 점이다. 그 위협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이 때문에 대리보충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말은 내가 아니라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의 제2부 두 번째 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에서 루소의 「참회록」을 설명하며 꺼내 든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모두들 이미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구태여 대리보충(la supplement)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다만 아주 제한적으로 이상하게도 우리를 막아서면서 환원 불가능하게 버티어선 그 흔적을 설명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결정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결정의 망설임. 그 흔적이 무언가 더해진 잉여의 덧셈에 따라 보충된 것인지(le supplement) 아니면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한 다음 대리하는 것인지(la suppleance) 그저 하염없이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장소. 물론 루소를 경유하여 데리다가 말하려는 것은 예술과 자연 사이의 대차대조표이다. 나는 거기서 물러나서 단지 이 텍스트 안에서 활동하는 저 텍스트가 왜 항상 환대받지 못하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왜 스스로 충만하지 못한 채 그 틈새 사이에서 출몰하는 저것은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저 안의 외침. 바깥이라는 안. 안에 있는 바깥. 무엇이 부족함을 대신하고 그런 다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