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세도 The Power for Ten Years
글:정성일(영화평론가) / 2015-03-12 (기사링크)
반복한다는 것.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찍는다는 문제는 한국영화에서 종종 제기되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김기영. <하녀>를 1960년에 찍은 다음 거의 같은 이야기를 칼라 버전으로 1971년에 <화녀>를 찍었다. 그런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충녀>를 이듬해에 만들었고 십년 뒤에 다시 <화녀 82>를 찍었다. 마치 하녀 역을 연기할 새로운 여자 배우가 나타나기만 하면 김기영은 언제든지 다시 찍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기영은 이 영화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영화사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세기가 바뀐 다음 같으면서 다른 버전으로 임상수가 2010년에 다시 <하녀>를 찍었다. 이만희가 1966년 <만추>를 만든 다음 김기영은 같은 시나리오로 <육체의 약속>을 1975년에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로 다시 김수용이 <만추>를 1981년에 찍었다. 무대를 미국의 시애틀로 옮긴 다음 김태용은 전면적인 개작을 해서 다시 <만추>를 2010년에 찍었다. 나는 지금 단순하게 리메이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기보다는 그 이야기가 먼저 있고 영화가 거기에 다가갔다는 전도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영화들을 무언가의 중심 안으로 환원시키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들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우리들은 거기서 매번 다시 시작하는 순간을 낚아채야 한다. 그런 다음 사라져 가버린 것들을 놓치면 안 된다. 그것들이야말로 서로 흩어진 이야기들이 그 스스로 차별 지어져 존재하게 만드는 진정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그 이야기들 사이의 매듭을 찾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운동을 모두 발견했을 때에만 비로소 따분한 반복과 사소한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논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