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정성일 칼럼을 닫으며 (원문 링크)
– 이정무 편집국장
이번 호 월간『말』에는 정성일 칼럼이 실리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실리지 않을 예정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미리 밝혀두지만 『말』지 편집진이 정성일을 ‘자른’ 것이 아니라, 정성일이 모종의 작업을 위해 절필을 선언했다. 정성일의 메일에 따르면 아마도 이 작업이 잘되건 아니면 ‘엎어지건’, 이 정도 표현이면 그 작업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복귀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무튼 정성일의 영화평론은 최소한 ‘당분간’ 지난 호가 끝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월간『말』은 어쩌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1991년부터 꾸준히 실려 온 최장수 연재였던 정성일의 글은 이미 『말』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편집진은 정기구독의 연장 사유로 정성일 칼럼을 들어왔던 오래된 독자들에게 앞으로 뭐라고 답해야 할 지 연구 중이다.
편집진이 변명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월간『말』의 편집자로서, 어찌되었건 정기구독자 숫자 감소에 대한 책임을 덮어쓸 수밖에 없는 나는 정 ‘선생’ 앞으로 연재를 중단하는 대신 정성일의 ‘새로운 작업’에 대한 기사를 싣자고 제안을 했고, 파격적이게도 그 기사를 정성일의 말투로 작성해 볼 결심을 했었다. 이 기사가 영화계에서 가끔 사용되는 ‘오마주’처럼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로 상당한 독자들이 편집진의 ‘성의’를 이해해 정기구독을 연장해 줄 것이라는 장삿속도 그 안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이 제안은 거절당했다. 다시 한 번 최대의 경의가 주를 이룬 협박성 메일을 보냈으나, 역시 예상대로, 이번엔 답장도 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칼럼은 정성일의 ‘무례’에 대한 복수이자, 쓰다만 ‘‘정성일의 영화세상’의 세상’이다.
나는 영화를 거의 모르는 탓에 이 기사를 위해 정성일이 그 동안 써온 칼럼을 일독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서 정성일을 검색해보면『말』을 포함하여 정성일이 써온 거의 모든 칼럼을 모아 둔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의 운영자는 정성일이 아니다. 그가 정성일의 글을 모아둔 것은 존경심 때문일 수도 있겠고, 복수심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써놓은 글을 몇 년 뒤에 다시 읽는 것은 형벌일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 복수심이 동기의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 모든 글을 읽고 나서도 역시 영화에 대한 지식은 별반 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는데, 정성일이 ‘민주주의자’라는 점이다. 정성일은 이런 저런 사설을 한참 풀어놓은 뒤 뭔가 의미심장한 듯한 분위기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늘 대중의 선택에 존경을 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기사를 자문해 준 단지 두 사람의 영화‘판’ 인사들의 말처럼 그는 엘리트의 냄새를 풍긴다. 평론이란 것이 남의 작업에 대한 시비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엘리트주의적 혐의를 주욱 흘려놓은 뒤 뚱딴지같이 튀어나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앙고백은 어떨 때는 어색하지만 대부분 슬프다.
정성일의 신앙고백이 슬퍼진 것은 짐작하건대 산업과 예술(운동을 포함한 모든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의 중간쯤에 서 있었던 영화가 완전히 산업 쪽으로 옮겨간 탓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는 가슴 떨리던 그 무엇과 성문화된 정치 제도의 중간쯤에서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지루해진 관습으로 옮겨갔다. ‘광주’가 없었다면,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봄날에 말이다, 80년대도 없었겠지만,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하는 세대들에게 광주는, 정성일에게 4.19가 주었을 느낌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역시 짐작이지만 정성일은 민주주의를 제외한 나머지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라든가 요즘 유행하는 공동체 어쩌구와 자유주의 따위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바치긴 힘들었던 것 같다. 누가 뭐래든 민주주의는 한번은 확실하게 ‘검증된’ 종교가 아닌가.
뻔한 이야기지만 민주주의 역시 하나의 시대적 산물이다. 최근 직전까지 민주주의가 품고 있었던 설렘은 역설적으로 최근 직전까지의 시대가 민주적이지 않았음을, 공정(?)했다면 사회의 지배층으로 올라섰었어야 할 이들이 세습이나 비대칭적인 폭력에 의해 지배층의 자리를 차지한 ‘놈’들에게 구박받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슬퍼진 것은 아마도 이들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일부는 뛰어난 학습능력에 의해, 그리고 결정적이게도 더 이상의 반항심을 포기함을 통해서 지배층의 일부분에 포함된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의 자랑처럼 이들이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슬퍼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성일은 ‘대박’ 영화를 만들지도 못했고, 조중동 같은 매체에 글을 쓸 기회도 잡지 못했고, 반항심을 포기할 만큼 똑똑하지도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16년 동안이나, 이건 과장이고 그의 글이 슬픈 것은 길게 잡아야 7~8년이다, 정성일의 슬픈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정성일의 무능력에 감사할 터!
메일에 따르면 정성일의 절필 기간은 3~4개월이 될 것 같다. 더 빠르게 그의 작업이 ‘엎어진다면’ 절필 기간은 좀 더 짧아질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절필이 아주 길어지길 응원하는 쪽이다. 그러나 절필이 짧든 길든 정성일 칼럼을 어찌할 것인가는 여전히 남는 숙제다. 정성일을 다시 복귀시키기 위해 애쓸 것인지, 전혀 새로운 인물을 영화평의 필자로 영입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에 올 민주주의가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일지와 연관이 있다. 만약 다음에 올 민주주의가 지난 날 그러했던 것처럼 대접받아 마땅한 이들이 출발선에서 배제된 체제에 대한 불만이라면 나는 정성일의 집 앞에서 ‘뻗치기’를 하게 될 것이다. 반대인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다르게, 다음에 올 민주주의가 천대받아 마땅한 이들이 더 이상 천대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다른 필자가 더 나을 것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지금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래도 정성일’쪽에 걸고 싶다. 정성일이나, 정성일의 민주주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안타깝지만 그쪽이 좀 더 현실에 가까워 보여서다.
2007년06월03일 ⓒ민중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