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예매 시작

2008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수라> (1971)
1971ㅣ134minㅣ일본ㅣColor/B&W (修羅 /Pandemonium(Shura)) 
1월 9일 수요일 오후7시. 상영 전 영화소개 (정성일) GV

    [ 맥스무비(link), 티켓링크(link) ]

+. 추가정보 (출처: 네오이마주와 영화 깊게 읽기 blog 中)
(전략)  백건영: 다른 감독이나 평론가들이 추천한 작품들 중 틀지 못한 작품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김성욱: 정성일 평론가는 몬테 헬만 영화를 추천했는데,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했던 적이 있어서요. 몬테 헬만으로 했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도 해요.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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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라인업 발표

서울아트시네마 카페 2007.12.26 23:12 ]
프로그램 노트 – 2008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립니다

연합뉴스 2007/12/26 18:06 (기사 링크) ]

(전략)… 상영작은 김영진 평론가가 고른 ‘꿈'(배창호), 김지운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마틴 스코세이지), 김태용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장선우), 배우 김혜수와 최동훈 감독의 ‘글로리아'(존 카사베츠), 류승범의 ‘아이다호'(구스 반 산트), 박찬욱 감독의 ‘순응자 II'(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오승욱 감독의 ‘최후의 증인'(이두용), 이명세 감독의 ‘로마'(페데리코 펠리니), 임순례 감독의 ‘집시의 시간'(에미르 쿠스트리차), 장준환 감독의 ‘애니홀'(우디 앨런), 정성일 평론가의 ‘수라'(마쓰모토 도시오), 홍상수 감독의 ‘라탈랑트'(장 비고)다. …(후략)

IMDB 정보 ]
마쓰모토 도시오. ‘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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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듀나,『용의 이』, 북스피어, 2007.12. – 정성일 추천사

[책표지 글]
저는 이 네 편의 소설이 정말 한 자리에서 읽을 만큼 재미있었습니다. 만일 저에게 이 네 편의 소설을 하나로 묶는 말을 허락한다면 ‘세계 몰락’프로젝트라고 부르고 싶어요. 이번에는 세 편의 소설이 모두 세계를 멸망시키는 데 정말 전력을 다하고 있군요. 그게 안 된다면 내가 없어져 버리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천국의 왕>). 처음에는 잘 몰랐다가 마지막에 <용의 이>를 읽으면서 왜 듀나는 차라리 세계는 그냥 몰락해 버리는 편이 나은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일까, 라는 그/그녀(들)의 기대의 지평에 약간 스산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이 귀여운 소녀가 꿈꾸는 세계 전멸의 기대. 아니 차라리 우주의 몰락이라고 부를까요. 
– 정성일(영화평론가)

[인터넷 서점 link (가나다순)]
리브로알라딘인터파크

+. 정성일씨의 추천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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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석훈,『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생각의나무, 2007.10

[출판사 제공 책소개 (알라딘에서 가져옴)]

노무현 시대의 시작과 함께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들을 내놓기 시작했던 필자는, 지난 4년 동안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여러 문제들을 제기하며 다양한 논쟁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주류 매체와 인터넷 매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단상들을 쏟아냈던 우석훈의 글이 가진 강점은 기본적으로 그의 시각이 현실에 단단한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일 터. 기업과 정부, 국제기구 등에서 활약했던 이력으로 미뤄보건대, 그의 글이 지닌 구체성과 현실성은 본인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일 것이다. 경제학자답게 우석훈은 여러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논리적 정합성과 통계를 덧붙여 상황을 시뮬레이션한다. 많은 지식인들의 글 중에서 그의 글이 유독 빛났던 것은, 고준담론의 논쟁에서 벗어나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발 딛고 사유하는 힘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좌파든 우파든 노무현 시대에 대한 불만을 소리 높여 성토하는 동안, 그는 현실을 되짚어 분석하되 그 속에서 모종의 희망을 지향했다. 그가 지향한 희망이란, 사실 간단하다. 좌파든, 우파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 행복해지는 사회! 그는 희망을 위한 키워드로 ‘명랑’을 내놓는다. ‘명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명랑’은 일종의 밝은 활력을 내포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빌리자면, 우석훈의 명랑은 승리를 담보하진 않지만 현실에 굴하지 않는, 절망하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 link (가나다순)]
교보문고모닝365알라딘yes24

+. “발문_ ‘명랑’ 좌파에게 건네는 전언” 이라는 제목으로 정성일씨의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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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중앙일보』2007.06.18. 김홍준 · 정성일 대담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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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말』2007년 6월호. [데스크칼럼] 정성일 칼럼을 닫으며

[데스크칼럼] 정성일 칼럼을 닫으며 (원문 링크)
– 이정무 편집국장

 이번 호 월간『말』에는 정성일 칼럼이 실리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실리지 않을 예정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미리 밝혀두지만 『말』지 편집진이 정성일을 ‘자른’ 것이 아니라, 정성일이 모종의 작업을 위해 절필을 선언했다. 정성일의 메일에 따르면 아마도 이 작업이 잘되건 아니면 ‘엎어지건’, 이 정도 표현이면 그 작업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복귀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무튼 정성일의 영화평론은 최소한 ‘당분간’ 지난 호가 끝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월간『말』은 어쩌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1991년부터 꾸준히 실려 온 최장수 연재였던 정성일의 글은 이미 『말』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편집진은 정기구독의 연장 사유로 정성일 칼럼을 들어왔던 오래된 독자들에게 앞으로 뭐라고 답해야 할 지 연구 중이다. 

  편집진이 변명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월간『말』의 편집자로서, 어찌되었건 정기구독자 숫자 감소에 대한 책임을 덮어쓸 수밖에 없는 나는 정 ‘선생’ 앞으로 연재를 중단하는 대신 정성일의 ‘새로운 작업’에 대한 기사를 싣자고 제안을 했고, 파격적이게도 그 기사를 정성일의 말투로 작성해 볼 결심을 했었다. 이 기사가 영화계에서 가끔 사용되는 ‘오마주’처럼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로 상당한 독자들이 편집진의 ‘성의’를 이해해 정기구독을 연장해 줄 것이라는 장삿속도 그 안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이 제안은 거절당했다. 다시 한 번 최대의 경의가 주를 이룬 협박성 메일을 보냈으나, 역시 예상대로, 이번엔 답장도 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칼럼은 정성일의 ‘무례’에 대한 복수이자, 쓰다만 ‘‘정성일의 영화세상’의 세상’이다. 

  나는 영화를 거의 모르는 탓에 이 기사를 위해 정성일이 그 동안 써온 칼럼을 일독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서 정성일을 검색해보면『말』을 포함하여 정성일이 써온 거의 모든 칼럼을 모아 둔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의 운영자는 정성일이 아니다. 그가 정성일의 글을 모아둔 것은 존경심 때문일 수도 있겠고, 복수심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써놓은 글을 몇 년 뒤에 다시 읽는 것은 형벌일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 복수심이 동기의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 모든 글을 읽고 나서도 역시 영화에 대한 지식은 별반 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는데, 정성일이 ‘민주주의자’라는 점이다. 정성일은 이런 저런 사설을 한참 풀어놓은 뒤 뭔가 의미심장한 듯한 분위기로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늘 대중의 선택에 존경을 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기사를 자문해 준 단지 두 사람의 영화‘판’ 인사들의 말처럼 그는 엘리트의 냄새를 풍긴다. 평론이란 것이 남의 작업에 대한 시비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엘리트주의적 혐의를 주욱 흘려놓은 뒤 뚱딴지같이 튀어나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앙고백은 어떨 때는 어색하지만 대부분 슬프다. 

  정성일의 신앙고백이 슬퍼진 것은 짐작하건대 산업과 예술(운동을 포함한 모든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의 중간쯤에 서 있었던 영화가 완전히 산업 쪽으로 옮겨간 탓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는 가슴 떨리던 그 무엇과 성문화된 정치 제도의 중간쯤에서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지루해진 관습으로 옮겨갔다. ‘광주’가 없었다면,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봄날에 말이다, 80년대도 없었겠지만,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하는 세대들에게 광주는, 정성일에게 4.19가 주었을 느낌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역시 짐작이지만 정성일은 민주주의를 제외한 나머지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라든가 요즘 유행하는 공동체 어쩌구와 자유주의 따위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바치긴 힘들었던 것 같다. 누가 뭐래든 민주주의는 한번은 확실하게 ‘검증된’ 종교가 아닌가. 

  뻔한 이야기지만 민주주의 역시 하나의 시대적 산물이다. 최근 직전까지 민주주의가 품고 있었던 설렘은 역설적으로 최근 직전까지의 시대가 민주적이지 않았음을, 공정(?)했다면 사회의 지배층으로 올라섰었어야 할 이들이 세습이나 비대칭적인 폭력에 의해 지배층의 자리를 차지한 ‘놈’들에게 구박받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슬퍼진 것은 아마도 이들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일부는 뛰어난 학습능력에 의해, 그리고 결정적이게도 더 이상의 반항심을 포기함을 통해서 지배층의 일부분에 포함된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의 자랑처럼 이들이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슬퍼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성일은 ‘대박’ 영화를 만들지도 못했고, 조중동 같은 매체에 글을 쓸 기회도 잡지 못했고, 반항심을 포기할 만큼 똑똑하지도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16년 동안이나, 이건 과장이고 그의 글이 슬픈 것은 길게 잡아야 7~8년이다, 정성일의 슬픈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정성일의 무능력에 감사할 터! 

  메일에 따르면 정성일의 절필 기간은 3~4개월이 될 것 같다. 더 빠르게 그의 작업이 ‘엎어진다면’ 절필 기간은 좀 더 짧아질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절필이 아주 길어지길 응원하는 쪽이다. 그러나 절필이 짧든 길든 정성일 칼럼을 어찌할 것인가는 여전히 남는 숙제다. 정성일을 다시 복귀시키기 위해 애쓸 것인지, 전혀 새로운 인물을 영화평의 필자로 영입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에 올 민주주의가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일지와 연관이 있다. 만약 다음에 올 민주주의가 지난 날 그러했던 것처럼 대접받아 마땅한 이들이 출발선에서 배제된 체제에 대한 불만이라면 나는 정성일의 집 앞에서 ‘뻗치기’를 하게 될 것이다. 반대인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다르게, 다음에 올 민주주의가 천대받아 마땅한 이들이 더 이상 천대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다른 필자가 더 나을 것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지금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래도 정성일’쪽에 걸고 싶다. 정성일이나, 정성일의 민주주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안타깝지만 그쪽이 좀 더 현실에 가까워 보여서다.

2007년06월03일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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