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의 두 꼽추 The two revengeful hunchbacks
글:정성일(영화평론가) / 2015-08-31 (기사링크)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아마 제목을 보고 먼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원한의 두 꼽추>는 무협영화이다. 그렇게 부르기는 했지만 그 시절 충무로에서는 일부러 (해서는 안 될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칼쌈’ 영화라고 부르거나 칼 소리가 부딪친다고 해서 의성어를 빌려 ‘짠짠바라’라고도 불렀다. 물론 이 표현은 일본영화에서 시대활극이나 임협물(任俠物)의 ‘殺陳’ 활극 시퀀스를 부르는 짠바라(チャンバラ)에서 온 말이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무협영화는 1967년 <풍운의 검객>으로 일시적으로 나타났고 그런 다음 <잡초> ‘이후’ 그의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진 장르이다. 종종 무기력한 방향상실. 나는 지금 <뇌검> <월하의 검> <비검> <요검>, 그리고 <삼국대협>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 제목들을 연도별로 순서대로 썼다. 이 영화들이 기괴해 보이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간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점점 나빠져 갔다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들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시절 연달아 서울에서 개봉한 호금전의 <용문의 결투>와 장철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영화적으로 아무런 공명을 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임권택은 이 실패들을 이미 준비된 결과처럼 받아들였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직업감독으로 그저 제안을 받으면 찍어야 했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던” 영화들이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권택은 이 영화들을 만들면서 반대로 직업감독으로서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사라져 가는 과정에 놓인 증명은 아닐까. 몰락해가는 영화산업. 참혹한 이중검열. 한국영화에서 1970년 혹은 1971년은 설명하기 까다로운 시간이다. (후략)